竹中重治(たけなかしげはる) 죽중중치(본명)
竹中半兵衛(たけなか はんべえ) 죽중반병위
(1544년 09월 27일 ~ 1579년 07월 06일)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로 잘 알려져 있다. 본명은 타케나카 시게하루. 통칭은 한베에(半兵衛), 같은 시기 활약했던 간베에(官兵衛) 구로다 요시타카와 함께 후대에 료베에(兩兵衛)로 불린다. 별명은 "금 공명" 또는 "금 남목"보통은 오다의 배신(陪:모실 배)이자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히데요시의 직신이라는 기록은 일절 존재하지 않고, 오다의 직신으로 파악된다. 전국시대 중신 옆에는 '메츠키(혹은 메츠케,目付)'라는 보좌역이자 감사 역할을 붙여주는데 한베에는 오다의 요리키(与力), 즉 메츠케였다. 히데요시와 같이 다닌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오다의 신하로써 히데요시 쪽에 파견된 것으로 사료된다. 비유하자면 '자회사 사장 하시바 히데요시' 밑에서 일하는 '본사 파견 임원' 같은 인물이었다는 얘기. 무엇보다 한베에는 히데요시보다 훨씬 일찍 성을 가진 성주 반열에 올랐고, 히데요시는 한베에가 죽기 5년전인 1574년에야 겨우 나가하마 성주가 되니 히데요시의 가신이라는 말은 얼토당토 않다.[1]
2. 생애
사이토 가문의 가신이자 이와테성 성주인 다케나카 시게모토의 아들로, 154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시게모토는 1560년에 별세했고, 이 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와테성 성주가 되어 본격적으로 사이토 가문을 섬기기 시작했다. 미노 삼인중의 한 명인 안도 모리나리의 사위이기도 하다.당시의 사이토 가문 다이묘인 사이토 요시타츠는 부친 사이토 도산에게 모반을 일으켜 당주에 오른 자였다. 자신의 장인이었던 도산을 죽인 요시타츠를 오다 노부나가가 가만히 둘 리 없었지만, 요시타츠는 미노에 침공해오는 오다군을 몇 번이고 패퇴시켰다. 그러나 요시타츠는 다이묘에 오른지 몇 년 지나지 않아 1561년에 병사했고, 그의 아들인 타츠오키가 13세의 나이에 후사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 타츠오키는 나이도 어렸고 잘 보아도 범재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561년 7월, 오다군의 미노 침공을 복병전술로 패퇴시킨 것이 바로 시게하루이다. 1563년에 있었던 오다군과의 전투에서도 사이토군은 시게하루의 전술 덕분에 승리했다.
그럼에도 주군 타츠오키는 주색에 빠져 정무를 돌보지 않았고 일부의 측근만을 총애하며 정작 시게하루나 미노삼인중은 멀리하기 시작했다. 시게하루는 이런 타츠오키를 일깨우고자 1564년 2월에 겨우 16명만을 이끌고 주가의 거성 이나바야마성(稲葉山城)을 하루만에 탈취했다.
노부나가는 이 일을 알고 나서 성을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시게하루는 이를 거부하고 8월에는 스스로 이나바야마성을 타츠오키에게 반환했고, 이후에는 스스로 사이토 가문을 떠나 아자이 나가마사의 객원 신분으로 약 1년간을 보내다 원래의 영지인 이와테로 돌아갔다.
1567년, 노부나가의 침공을 받고 사이토 가문은 멸망했다. 노부나가는 낭인으로 지내던 시게하루를 등용하고자 했다. 미노 침공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노시타 도키치로(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른바 "삼고의 예"를 보여 시게하루를 등용하고자 했고, 시게하루가 히데요시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오다의 가신으로 일하는 것은 꺼렸으나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는 것은 승낙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나 이는 후대에 와서 미화/창작된 일화인 것으로 보이고, 현재의 통설은 동생 시게노리와 함께 노부나가의 직신으로 등용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노부나가 포위망이 만들어지자 시게하루는 이전에 아자이 가문에 몸 담고 있었던 경력을 살려 설득역할을 맡게 되고, 아자이측의 두 개 성을 설득하여 오다측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직후에는 아네가와 전투에서 안도 모리나리의 부대에 참전했고 전투가 끝난 뒤에는 요코야마성에 히데요시와 잔류하게 되어 이 때부터 히데요시에게 조력해 히데요시를 오다 가문의 중신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일을 했다.
히데요시가 오다군 츄고쿠 원정 총사령관에 임명되자 시게하루도 히데요시를 따라 원정길에 나선다. 1578년에 우키타 가문의 성 하치만야마성(팔번산성)을 설략으로 빼앗아 노부나가에게 칭찬받았다. 같은 해 아라키 무라시게가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키자(아리오카성 전투),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해 구로다 요시타카가 아리오카성으로 향했지만 성내에서 포박당했다. 요시타카의 내통을 의심한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요시타카의 장남 쇼쥬마루[2]를 죽일 것을 명령했다.
이에 시게하루는 직접 "그 일 제가 받들겠나이다"라고 고하며 쇼쥬마루가 있던 나가하마성으로 향해 그를 자신의 영지인 보다이산성(보제산성)으로 옮기고 히데요시에게는 가짜 머리를 바쳐 쇼쥬마루의 목숨을 구했다.[3]
1579년 4월, 미키성을 포위하고 있던 중에 쓰러졌다. 히데요시는 시게하루의 병세를 걱정하여 교토로 돌아가 요양하도록 권했으나 시게하루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무사인 몸, 전장에서 죽고 싶다"고 간청하였고, 결국 6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35세. 사인은 폐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몸이 약하고 작은 체구에 얼핏 보면 여성과도 같다'[4]고 전해지고, 출진시에도 말에 탄 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항상 볼품없는 말을 타고 다녔는데 이를 본 히데요시가 "자네 정도의 사람이 그런 말을 타고 다니나?"라고 묻자, 시게하루는 "명마를 타고 다니면 전투 중에 명마를 아까워해서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게 되니 이런 말을 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중국 한나라의 ' 진평'과 자주 비교되어 '금남목(今楠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남목'이란 '楠木'. 즉, 일본 남북조시대의 영웅이자 군략의 천재였던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를 뜻하며, 풀어쓰자면 '오늘날의 구스노키 마사시게' 라는 뜻이다. '금공명(今孔明)'이라는 칭호는,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맞아들일 당시의 삼고의 예 이야기와 함께 끼워맞춘 것으로 보인다.
무공야화에서는 "온화하고 기품이 있으며 자비로운 눈을 지녔고 학재도 있어 군서에 해박하다"고 하며 전장에서는 항상 "태연자약한 자세"로 적과 대치했다고 전한다.
태합기나 상산기담에 따르면, 부인과 같은 용모 때문에 괄시받아 주군을 비롯한 가신단에게 괄시받았고 심지어는 가신인 사이토 히다노카미가 채 위에서 그에게 조롱하며 얼굴에 소변을 쏜 일마저 있었다고 한다.
며칠 후 히다노카미가 타츠오키의 방 옆에서 숙직 임무를 맡고 있었던 날, 시게하루는 성에 머물고 있던 동생 시게노리의 간병을 이유로 등성해 히다노카미를 끔살하고 타츠오키 및 가신단 대부분을 추방해 이나바야마성을 빼앗았다고 한다. 뒤치기에 제대로 당한 셈.
젊은 나이에 진중에서 병사한 것과 죽을 때 까지도 책략을 냈던 것을 보면 조조의 참모였던 곽가(38살로 사망)와 이미지가 겹치기도 하지만, 성품이 개차반이었던 데다가 품행이 좋지 않았다는 곽가와는 달리 온화하고 품행이 단정했다는 점에서는 곽가와는 인상이 사뭇 다르다.
나름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지만, 요절한 탓인지 1만 석 이상인 다이묘는 된 적이 없다. 사촌동생이 히데요시를 섬기면서 다이묘가 되었으나 그의 아들 대에 가이에키당해서 끊어졌다.
아들인 타케나카 시게카도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지리적으로 서군에 붙어야 좋을 위치에 있었으면서도[5] 동군에 붙는 안목을 발휘하여 영지를 보전했다.[6] 그리고 뒷날 시게카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기인 '도요카가미'를 저술하였다.
3. 대중매체에서
창작물에 등장하는 한베에는 보통 노부나가의 내통 제안을 번번히 거절하다 히데요시의 삼고초려(?)에 자택을 나서면서 '노부나가의 부하가 아니라 히데요시의 부하라면 사관하겠다'는 대사를 보통 많이 친다. 한베에의 오다 사관 과정은 히데요시의 '히토타라시(사람 홀리는 매력, 人たらし)'의 예로써 곧잘 회자되지만 실제로는...3.1. 전국 바사라 시리즈
타케나카 한베에(전국 바사라) 문서 참조.3.2. 전국무쌍 시리즈
타케나카 한베에(전국무쌍) 문서 참조.3.3.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
노부나가의 야망 무장풍운록에선 당시에 지모 계열 능력이 없어서 전투가 93으로 나온다. 이게 어느 정도나면 시마즈 요시히로와 오다 노부나가, 시바타 카츠이에와 다케다 4명신과 야마모토 간스케보다 높은 거다!!
노부나가의 야망 창천록에서는 전형적인 책사형 무장. 특히 '이반' 책전이 다케다 신겐의 그것과 비견될 정도로 무섭다. 단, 통솔력이 70대로 고만고만해서 주장으로 쓰기엔 미묘하고 통솔력 높은 다른 무장과 함께 내보내는 게 좋다.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는 통솔이 무려 96에 지력이 100을 넘고 고유 전법 '치료'까지 있는 S급 장수였다. 다만 정치가 60대 중반으로 꽤 낮은 편. 천도에선 통솔이 78로 대폭 너프당했다. 무력도 61에서 36으로 칼질... 그나마 지력이 102라 매우 높은 편.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선 통솔이 다시 90으로 상승하고 지력도 99가 되었지만 정치가 57이라 내정굴리긴 빡빡하다. 하지만 성장 특성도 고유 특성을 받은 데다 전법인 '금공명'이 일시적으로 적의 공격력을 낮추고 혼란을 걸어 무력화시키는 고유 전법이기에 활용도가 높은건 여전하다. 한베에의 경우 천하삼십장이나 군웅집결 등의 가상 시나리오에서는 무조건 히데요시의 부하로 설정되어 있다. 재미있는건 튜토리얼에서 8세때 히데요시의 조략으로 오다 가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별사탕 10개, 그것도 각기 다른 색깔을 받는 조건으로 가게 된다.
전국입지전에서의 일러스트는 본 항목 상단 맨 위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그려졌다.
삼국지 12에서는 전법이 팔진도. 스킬로 제갈량과 엮으려는 시도가 보인다. 물론 비교적 수명도 길고 업적도 많은 제갈량에게 비견하려는 것은 좀 무리수. 오히려 단명한 곽가와 비슷하기 때문에 일러스트도 곽가와 비슷하다.
3.4. 전국연희
타케나카 시게하루(전국연희) 문서 참조.3.5. 반요 야샤히메 코믹스
13화에서 키노시타 토키치로와 함께 오와리 편에서 잠깐 등장. 작년에 키노시타가 스노마타 일야성 건으로 출세했다고 언급된 걸 보면 1562년 또는 1567년으로 추정된다.[8] 토키치로의 군사라고 언급되지만 토키치로가 한베에 님이라며 존대하는 걸 보면 지위는 이쪽이 더 높은 듯하다.오다 가문으로 시집올 예정이었다가 도중에 문어 요괴에게 납치당한 아이야라는 히메를 되찾기 위해 키노시타와 함께 지나가던 퇴치사들인 야샤히메들과 함께 구출 작전을 펼친다. 그 문어 요괴는 그리 머리가 좋지 않아 이 도로를 지나가던 여성용 가마는 전부 납치하던 상황이었기에 세츠나를 히메로 꾸며서 토치키로 및 병사들까지 데리고 동행한다. 야샤히메들과 리쿠가 자꾸 세츠나의 히메 복식을 사진으로 찍는다고 떠들자 네들을 변장시키겠다고 디스한다. 그 말을 들은 토키치로는 역시 한베에의 계책에는 아름다움이 있다며 칭찬한다(...) 그렇게 미끼에 넘어가 문어 요괴가 야샤히메들을 데려간 상황에서 토키치로까지 동행하자 걱정한다. 이후 제로에게 세뇌당할 뻔한 아가씨를 야샤히메들이 구출하자 감사를 전하고 헤어진다.
야샤히메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며 정중하게 대한다. 아무래도 이누야샤 세계관이 웬만한 인간들로는 대응할 수 없는 요괴에게 뭐하면 털리다 보니 웬만큼 지위가 있어도 퇴치사들을 존대하는 문화가 있는 모양. 토키치로도 괴력난신으로는 천하를 유지할 수 없다며 인간의 지혜로 천하를 쥐는 게 오다의 방침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번 사안에 퇴치사를 고용한 것과 토키치로가 외뢰의 보수로 야샤히메들이 오다를 만나게 했다가는 재미있어 보인다며 몇 달간 못 가게 붙잡고 이래저래 빡세게 부려먹을 거라고 평한 걸 보면 요괴들 건은 퇴치사들에게 맡기는 게 더 효율적이라서 어느 정도의 커넥션은 유지하는 모양이다.
[1]
북부 오우미를 하사받을 당시에도 오다 중신 서열로는 한참 떨어졌던 위치였다. 노부나가 사후 1582년의
키요스 회의 때 조차 히데요시의 명목상 의전은 서열 4, 5위격이었다.
[2]
쿠로다 나가마사의 아명.
[3]
후에 구출된 요시타카는 이 일을 굉장히 감사히 여겼지만, 때는 이미 시게하루가 병사한 뒤였다.
[4]
"그 용모는 부인과도 같아"라 써져있다.
[5]
그냥 서군에 붙는 게 유리한 정도가 아니라, 만일 저 상태에서 서군이 이겼다면 망하기 딱 좋은 위치였다. 전장인 세키가하라 일대가 바로 자기 영지였는데다가, 세키가하라 서쪽에는 바로 서군 총대장인 이시다의 22만석 영지와 서군 주요 영주인 오타니의 스루가 5만 석 영지가 나오고, 반대쪽인 동쪽으로 가도 바로 서군 주요 집결지였던 오가키 성을 위시해서 서군측 영지밖에 안 나온다. 참고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타케나카 가문의 영지 석고는 단 5천 석에 불과했다.
[6]
그러나 동군에 협력했음에도 포상은 그가 잡아온 고니시 유키나가의 도검 정도 뿐으로 끝내 다이묘는 되지 못했다.
[7]
가문의 격은 코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로, 다이묘와 같이 참근교대를 하도록 되어 있는 하타모토 가문이다.
[8]
이 일화는 후세에 만들어졌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