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2 17:51:35

존 벨 해처


1. 개요2. 생애

1. 개요

John Bell Hacher

미국의 고생물학자로 트리케라톱스, 토로사우루스 등 화석을 발굴했다.

2. 생애

화석 수집에 대한 열정에 휩싸인 존 벨 해처는 1884년 오스니얼 찰스 마시에 의해 월 50달러의 초기 금액으로 고용되었다. 그의 첫 임무는 로웰 딩거스의 '롱아일랜드 코뿔소 채석장'이라고 불리는 캔자스 주 롱아일랜드의 한 부지에서 재료를 수집하는 찰스 헤이즐리우스 스턴버그의 감독 아래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존 벨 해처는 오스니얼 찰스 마시로부터 정식 교육과 훈련을 받은 것으로, 조심스러운 일꾼인 것을 증명했고, 다른 수집가들이 피해를 가한 화석보다 피해가 적은 화석을 발굴하는 데에 무척 능숙했다. 해쳐는 이곳에서 발굴하는 방법을 토대로 최초로 발굴한 지역 위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 사각형 모양의 격자 시스템을 개발하여 표본을 발굴한 정확한 위치를 기록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지도 체계는 한 규율의 기초라고 여겨진다. 롱아일랜드 코뿔소 채석장은 현재 텔레오케라스로 알려져 있는 화석을 포함하여 다양한 발굴에 걸쳐 많은 표본들을 산출했다. 존 벨 해처는 1893년까지 마시의 고용인으로 지냈고, 그는 서부 주 전역의 화석 야전 연구 등에 뛰어났다.

1889년 와이오밍 주 루스크 근처에서 해처는 토로사우루스의 첫 번째 화석 유적을 발굴했다. 그러나 해쳐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과학계에 올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부분적으로 조교들이 스스로 출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마시의 정책 때문이었다. 마시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마쉬가 예일 대학이나 USGC에서 영구적인 지위를 얻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수집품에 대해 쉴 틈 없이 지속적인 현장 작업을 한 것도 다른 직업을 구하는 이유를 들었다. 1890년 프린스턴 대학교 윌리엄 베리만 스콧에게 자리를 부탁했으나 자금 지원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그 후 헨리 페어필드 오스본과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자리를 놓고 협상을 벌였으나, 결국 1891년부터 1896년까지 피바디 자연사 박물관에서 지질학 조수로 일하기로 마시와 계약을 맺었다. 그 계약은 또한 그가 현장에 없을 때 소장품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1892년, USGC의 자금이 의회에서 극적으로 삭감되었고, 마시는 더 이상 서구에서 해처에게 그를 위해 모금을 지불할 수는 없었다. 일부적으로 협상한 끝에 그들의 계약은 1893년 일찍 끝났다. 1904년에 데이노수쿠스의 화석을 연구 중 장티푸스로 인해 사망했다. 사후 동료들이 그의 이름을 따 데이노수쿠스 하트케리(Deinosuchus hatcheri)라고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