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은 1881년( 고종 18년) (양력) 5월 7일부터 8월 26일까지[1] 1876년의 수신사에 이어 일본 제국에 파견되었던 조선의 문물 시찰단이다.과거에는 근대화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 영향을 받은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는 명칭으로 위장하여 불린 것이 고착화되었으나, 한국사 용어 수정안에 따라 "조사 시찰단"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다. 시찰단의 단원들은 동래부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2]로도 불렸다.
개화파로 구성된 박정양을 포함한 60명이 파견되었으며, 비밀리에 파견되었기에 암행어사의 신분으로서 부산을 통해 뱃길로 도쿄로 향했다.
2. 배경
그 이전부터 일본의 시찰단 파견 권유(내지는 요구)는 계속 있어왔지만, 강화도 조약(1876)과 통리기무아문(1880)의 설치, 조선책략의 반향과 영남 만인소사건등으로 서구식 개혁에 대한 조선 국내 여론이 나빠지자 조선 정부는 1881년이 되어서야 비밀리에 조사시찰단을 파견하게 된다.조선측의 김홍집과[3],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 교섭하에 이루어졌다. 조사 시찰단의 파견비용은 조선정부가 전적으로 부담했다.
3. 여담
연표에 세심한 관심을 가진 역사학도들과 수험생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조선에서 태양력이 공인된 것은 1895년으로, 당시에는 태양력이 공인되지 않았으며, 1897년 이전의 일이므로 대한제국 선포 이전에 이루어진 일이다.많은 사람들이 어감때문에도, 시찰단의 성격 때문에도 조사 시찰단의 "조사"가 "조사하다"의 조사(調査)라 생각하지만, 아침 '조(朝[4])'자에 선비 '사(士)'자 쓰는, '조정 관료'라는 의미의 조사( 朝 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