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 김해부 양전사 조문선 趙文善 |
|
성씨 | 조(趙) |
이름 | 문선(文善) |
생몰년도 | ? - 992년 |
국가 | 고려 |
[clearfix]
1. 개요
고려 초의 관리로, 성종(고려) 때 김해부[1]의 양전사였다.삼국유사에 수로왕릉 능묘 전답과 관련된 일화에서 등장한다.
2. 생애
992년, 김해부(金海府)의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은 조정에 수로왕릉의 능묘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다며 15결만 능묘에 소속되게 하고 나머지는 김해부의 역정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보고했다.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조문선이 재차 보고하자 조정도 수락해 15결은 수호왕릉 능묘에 속하게 하고 나머지 밭들은 역정들에게 분배하게 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때쯤 조문선은 귀신들에게 시달리다가 병으로 사망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능묘에 소속된 밭이 15결이 아닌 3결 87부 1속이 부족한 11결 12부 9속이었다. 성종은 칙령을 내려 부족한 토지를 채워주었다고 한다.
3. 기록
순화(淳化) 2년에 김해부(金海府)의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이 조사해서 보고하였다.
“수로왕의 능묘(陵廟)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15결을 가지고 전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그 장계(狀啓)를 전하여 보고하자, 그때 조정에서는 명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해서 성군(聖君)이 되었고 이내 왕위(王位)에 올라 오래 살았으니 곧 나이 158세가 되었다. 저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 붕어한 뒤에 선대(先代)부터 능묘(陵廟)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진실로 의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고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이를 그렇다고 여겨 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않고, 반은 그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절사(節使)[원주]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에 그 반은 능원(陵園)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府)의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었다.
거의 일이 끝날 때에 양전사(量田使)가 몹시 피곤해 하더니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7, 8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가지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하였다. “너에게 큰 죄가 있어 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刑)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서 깨었다. 이내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서 관문(關門)을 지나 죽었다. 이 때문에 양전도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뒤에 사신이 와서 그 밭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이고 부족한 것은 3결 87부 1속이었다. 이에 모자라는 밭을 어찌했는가를 조사해서 내외궁(內外宮)에 보고하고, 칙명으로 그 부족한 것을 채워 주게 했는데 또한 고금(古今)에 탄식하는 자가 있었다.
“수로왕의 능묘(陵廟)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15결을 가지고 전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그 장계(狀啓)를 전하여 보고하자, 그때 조정에서는 명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해서 성군(聖君)이 되었고 이내 왕위(王位)에 올라 오래 살았으니 곧 나이 158세가 되었다. 저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 붕어한 뒤에 선대(先代)부터 능묘(陵廟)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진실로 의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고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이를 그렇다고 여겨 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않고, 반은 그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절사(節使)[원주]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에 그 반은 능원(陵園)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府)의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었다.
거의 일이 끝날 때에 양전사(量田使)가 몹시 피곤해 하더니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7, 8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가지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하였다. “너에게 큰 죄가 있어 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刑)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서 깨었다. 이내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서 관문(關門)을 지나 죽었다. 이 때문에 양전도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뒤에 사신이 와서 그 밭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이고 부족한 것은 3결 87부 1속이었다. 이에 모자라는 밭을 어찌했는가를 조사해서 내외궁(內外宮)에 보고하고, 칙명으로 그 부족한 것을 채워 주게 했는데 또한 고금(古今)에 탄식하는 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