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8 12:58:31

조구(초한쟁패기)


西楚
서초의 대사마(大司馬)
{{{#!wiki style="margin: 0 -10px -5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81818,#e5e5e5
전임자들 1대 2대 3대
불명 조구 용저 주은
※ 둘러보기: 한의 대장군 (大將軍) }}}}}}}}}}}}}}}

<colcolor=#ece5b6>
서초 대사마
曹咎
조구
작위 <colbgcolor=#fff,#000>해춘후(海春侯)
최종직위 대사마(大司馬)
성씨 (曹)
(咎)
생몰연도 ? ~ 기원전 203년
사망지 성고(成皐) 혹은 사수(汜水) 인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font-size: .93em;"
진(秦) 옥연(獄掾)
서초(항우) 대사마(大司馬) }}}}}}}}}

1. 개요

통일 진나라 ~ 초한쟁패기의 인물. 후초의 대사마를 지냈으며, 작위는 해춘후(海春侯).

2. 생애

진나라 말기 기현(蘄縣)의 옥연(獄掾)을 지냈다. 역양현의 옥연 사마흔과 함께 항량을 숨겨줬던 일로 항우의 신임을 받아 대사마에 봉해졌다.

기원전 204년(한왕 4년 10월), 항우와 한왕 유방이 광무산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팽월이 양나라 땅을 평정하고 초나라의 군량을 차단했다. 항우는 대사마 조구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성고(成皋)를 지키되, 한나라가 쳐들어오더라도 싸우지 말고 동쪽으로 오지 못하게만 하시오. 나는 15일이면 팽성을 차지하고 양나라를 평정할 것이니, 돌아와서 장군과 합류하겠소.

그렇게 항우의 명을 받아 사마흔, 동예(초한쟁패기)와 함께 성고를 지키게 되는데, 기원전 203년에 한나라군의 도발에 넘어간 조구는 병사를 이끌고 사수를 넘어 공격하려다가 한나라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패배한 조구는 사마흔, 동예와 함께 사수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3. 평가

분명 서초라는 당대 최강국의 대사마로 군재가 있을 법 하며, 항우가 직접 성고를 맡겼을 만큼 군주의 신임까지받던 인물인데, 활약상이 영 좋지 못하다. 항우의 명령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한나라군의 도발에 넘어가버려 대사를 그르친 것만 봐도 군재 부분에서는 의문을 품을 만하다. 물론, 조구가 상대한 유방 역시 만만치 않은 군재의 소유자였기에 기만술, 도발에 당해 직접 나아가 싸우다 졌다는 변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군주이자 사령관인 항우의 싸우지 말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나가 싸웠다는 것만 봐도 훌륭한 장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항우가 군재도 검증되지 않았던 조구를 자신의 숙부인 항백을 숨겨줬었다는 이유로 대사마에 임명하고 성고같은 요충지를 맡겼을 수도 있다. 어차피 지키기만 하면 되니, 군재보다는 신임을 더 중요시 했던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나, 이것이 사살이라면 항우의 인선 실패라고 밖에 볼 수 없다.

4. 대중 매체에서

문정후 초한지에서는 항우가 팽월을 토발하기 위해서 자기가 올 때까지 성고성 수비를 맡긴 인물로 등장한다. 항우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조구는 한나라군의 도발에 넘어가 출전했는데 매복을 당해서 패배해 사망하고 성고성도 함락당한다.[1]
[1] 실제 역사에서 사마흔, 동예와 함께 성고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함께 자결했는데, 해당 작품에서 사마흔과 동예는 팽성 전투 이후 항우에게 투항했다가 둘 다 처형당하면서 조구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