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94년 10월 31일 제26기계화보병사단 예하 제123기계화보병대대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 # 이 사건으로 중대장(대위) 1명과 소대장(중위) 1명이 숨지고 범인(일병)은 총으로 자살하였다.2. 사건의 전개
1994년 10월 31일 오후 2시 25분경 제26기계화보병사단 예하 제123기계화보병대대 3중대 소속 사격성적 미달 병사들의 개인화기 영점사격 훈련이 실시되던 중[1] 다음 차례였던 3중대 3소대 서문석 일병(당시 21세)이 실탄 10발이 든 탄창을 수불받은 후 K-2 소총에 장전하고 사로에서 격발 명령을 기다리다가 격발 명령이 하달되자 자리에서 일어서서[2] 사병들을 향해 '엎드려'라고 외친 후 즉시 실탄 수불을 하던 3소대장 황재호 중위를 향해 2발, 2소대장 조민영 중위를 향해 2발을 발사하고 30m 전방 사격선에서 사격통제관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3중대장 김수영 대위를 향해 2발을 발사하였다.이후 허공을 향해 남아 있던 4발을 발사하였고 총알이 바닥난 것을 알아챈 분대장 김모 병장이 달려들어 K-2 소총을 빼앗자 서문석 일병은 주변의 다른 병사의 소총을 들어 허공을 향해 5발을 발사하고 이어서 자신의 머리를 향해 1발 격발하여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3소대장 황재호 중위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며 2소대장 조민영 중위는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고 3중대장 김수영 대위는 국군덕정병원 (현 국군양주병원)으로 후송 중 사망하였다.
3. 원인
군 자체 조사 결과 서문석 일병은 아버지를 2살 때 여의는 등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며 이로 인해 가족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알려졌고 둘째 형 역시 1991년 군생활 중 자살하는 등 불우한 환경의 영향에 초점이 맞춰졌다.3.1. 또 다른 원인?
일반적으로 사병에 의한 군 총기사고의 대부분이 평소에 자신을 괴롭히던 동료 사병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해당 사건은 간부를 범행 대상으로 삼았으며 범행 직전 근처 사병들에게는 '엎드려' 라고 외치는 등 동료 사병에겐 피해를 입히려 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 사건은 단순한 군내 따돌림, 괴롭힘 사건과 달리 당시의 군 분위기와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이 사건이 발생하기 약 한 달 전 이른바 " 소대장 길들이기"로 불리는 군내 하극상으로 53사단 장교 무장탈영 사건이 발생하여 군 기강문란이 군 내부뿐만 아니라 언론에서도 크게 조명되면서 국방부 차원에서 군 기강 바로잡기가 중요한 화두로 올라섰는데 이를 위해 군기 잡기를 명목으로 무리한 행위들이 이루어지면서 간부들에 대한 병사들의 불만이 누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건 초기에 육군에서도 이러한 과도한 군기잡기에 대한 반발을 원인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당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건 당일 사격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사격 성적 미달 병사들을 대상으로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2시간에 걸쳐 사격술 예비훈련(PRI)이라는 명목하에 강도 높은 PT체조를 진행하였으며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1시부터 실제 사격 전까지도 추가 훈련을 진행하였다고 알려졌다. 이로 인해 그간 간부들에 대한 불만을 지속적으로 누적해 왔던 가해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유추할 수 있다.
4. 비판
이 사건이 발생하기 불과 한 달 전에 이른바 " 소대장 길들이기"로 불리는 군내 하극상 사건으로 53사단 장교 무장탈영 사건이 발생하는 등 군 기강 문란이 크게 문제가 되었음에도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상관 살해라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터져나와 군 전반의 기강 해이가 심각하다고 비판받았다.가해자 서문석 일병이 불우한 가정환경을 지녔고 군 생활 중에도 평소 비관적인 말을 자주 하였으며 종종 주변 전우에게 같이 탈영할 것을 권유하는 등 비극적인 사건의 전조증상이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관리하지 못했다는 점 역시 비판받았다.
5. 피해자 및 가해자
5.1. 피해자
- 사망
- 3중대장 대위 김수영 (육사 44기)
- 3중대 3소대장 중위 황재호 (학군 31기)
- 부상
- 3중대 2소대장 중위 조민영 (학사 22기)
5.2. 가해자
- 사망
- 3중대 3소대 일병 서문석 (2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