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22:32

제2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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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정부총통 선거
1948년 4월 19일 ~ 1948년 4월 29일 1954년 3월 21일 1960년 3월 21일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제2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제3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
파일:1954년1기2회국민대회.jpg
타이베이 중산당에서 열린 국민대회의 전경[1]

1. 개요2. 배경3. 전개
3.1. 국민대회 개최3.2. 정부총통 선거
4. 결과5. 참고문헌

1. 개요

1954년 2월 19일부터 2월 25일까지 개최된 중화민국 2대 총통, 부총통 선거.

2. 배경

국부천대 이후 미국의 원조와 성공적인 교육개혁, 토지개혁으로 정권의 기반을 다진 중국국민당 정권은 제7차 전국대표대회를 기점으로 부흥건국을 표방, 대륙 탈환을 준비하게 되었다. 1953년 5월 5일부터 5월 7일까지 국민당 7기 2중전회가 타이베이에서 소집되어 반공, 복국, 건국의 힘을 응집해 자강의 신념을 확립하고 과학화, 조직화, 제도화로 국민당의 중건공작을 이룩한다고 결의했다. 한편 1948년에 당선된 장제스의 임기가 만료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총통 임기 만료 90일 이전에 새로운 총통을 선거해야 한다는 중화민국 헌법에 따라 국민대회가 1954년 2월에 개최되기로 결정되었다.

마침 우궈전 사건 쑨리런 쿠데타 모의 사건 등으로 대만 내부 자유파를 완전히 거세하고 천리푸 CC단까지 제거한 장제스는 더 이상 대만 내부에 정적이 없는 상태였다.

3. 전개

3.1. 국민대회 개최

하지만 많은 국민대회 대표들이 대만에 넘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정족수가 부족하여 국민대회 개회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에 장제스는 1953년 9월, 행정원의 건의에 근거하여 1기 국민대표들은 대륙에서 새로운 국민대표를 선거할 수 있을때까지 직권을 계속 행사하기로 결정하여 대륙에서 선거된 국민대표들을 사실상 종신직으로 만들었다. 이어 <국민대표 결원보충법>과 <제1기 국민대회직업단체와 부녀단체대표 결원보충법>이 발표되면서 국민대회 대표들과 후보대표들에게 1953년 10월 10일부터 12월 말까지 내정부에 본인이 직접 등록하도록 했는데 등록하지 않은 자나 3년 이상 행방불명된 자들은 자격을 취소하였다.

12월말까지 총 1401명의 대표와 623명의 후보대표가 등록되었고 423명의 대표가 자격이 취소되었다. 그리고 후보대표 중 42명이 대표로 보충되었으며 1기 국민대회 결원보충 조례에 의거하여 159명을 추가로 충원, 총 1643명의 국민대표 수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대회의 정족수인 1523명 이상의 대표가 확보되어 국민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중화민국 정부는 정족수 미달을 우려하여 <국민대회 조직법>을 개정, 정족수 조건을 1/3으로 줄여 정족수 부족으로 인한 유회를 예방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민대회는 만년국회라 불리게 되었다.

3.2. 정부총통 선거

1954년 2월 15일, 장제스는 국민당 7기 중앙위원 임시 전체회의를 소집, 차기 총통 후보를 지명하게 했다. 국민당은 당연히 장제스를 새로운 총통후보로 추대했고 장제스는 맨 처음 허잉친에게 부총통 자리를 제의하였으나 허잉친이 사양하면서 천청을 부총통 후보로 지명했다. 이어 1기 국민대회 2차 회의가 2월 19일 타이베이에서 개최되었다. 총 1578명의 대표가 참여했으며 이중 203명이 해외에서 온 대표들이었다. 이들 중 85명으로 주석단을 선출하고 후스를 임시 의장으로 추천하였다. 후스는 2차 회의가 완전한 합법이며 헌법에 의거하여 총통과 부총통을 선거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2차 회의는 미국에 체류하던 부총통 리쭝런의 탄핵을 결의, 1486명의 출석 대표 중 1403명의 찬성으로 <리쭝런 파면안>을 가결하여 리쭝런을 탐오하여 나라를 그르친 혐의로 파면하고 그 후임은 보선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의 폐기, 수정 혹은 연장 여부가 논의되었으나 정식으로 폐기하기 전까지 이를 계속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기로 결의하여 존속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2차 총통 선거에는 중국국민당의 장제스와 천청 외에 중국 민주사회당에서 서부림이 총통 후보로 출마했으며 국민대표대회가 추천한 모더후이, 왕운오, 석지량이 부총통 후보로 등록했다. 이때 미국에 거주하던 쿵샹시가 부총통 등록을 시도하였으나 장징궈가 그를 낡은 사회의 권세있는 집안 사람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함에 따라 출마를 포기하였다. 이후 무당파였던 모더후이와 왕윈우는 중간에 경선을 포기하였고 최종적으로 서부림, 석지량이 민사당의 총통과 부총통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파일:1954년장제스취임.jpg
장제스의 취임

3월 21일 실시된 1차 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이 나오지 않음에 따라 4차 투표까지 결선투표를 진행해서 마침내 장제스와 천청이 각각 1507표, 1417표를 얻어 48표, 109표를 얻은 서부림과 석지량을 누르고 2대 총통과 부총통으로 당선되어 1954년 5월 20일에 취임하였다.

4. 결과

장제스는 총통에 재선된 이후 장징궈를 국가안전회의 부비서장에 임명하여 정보계통 책임자로 삼음으로 그를 키워나갔으며 천청이 부총통 행정원장을 겸임하게 되며 소위 장진체제가 자리잡히게 된다. 이는 천청이 사망하는 1965년까지 지속되었다.

5. 참고문헌

  • 신승하, 中國當代 40年史 : 1949 - 1989(서울: 고려원, 1993)
  • 장성구, 대만현대정치사 상(서울: 지영사, 1992)


[1] 맨 앞줄 왼쪽부터 행정원장 천청, 영부인 쑹메이링, 총통 장제스, 입법원장 장다오환, 감찰원장 위유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