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02:21:13

제임스 기본스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제임스 기본스
James Gibbons
파일:GibbonsPhotoStanding.jpg
출생 1834년 7월 23일
미국 메릴랜드 볼티모어
사망 1921년 3월 24일 (향년 86세)
미국 메릴랜드 볼티모어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종교 가톨릭
직업 추기경
직위 볼티모어 교구 대주교[2]
서명
파일:Famous_Living_Americans_-_Cardinal_Gibbons_Signature.jpg
문장
파일:gibbons1.gif
1. 개요2. 생애3. 활동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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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가톨릭 추기경. 가톨릭 교리서 교부들의 신앙을 저술했다.

2. 생애

저자 제임스 기본스 추기경은 1834년 7월 23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Baltimore)에서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제임스 추기경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에는 틀림없이 부모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3] 1855년에 성 찰스 칼리지(St. Charles College)를 졸업하고, 1857년에 고향에 있는 성 마리아 신학교에 입학하여 1861년(26세)에 신부로 서품되었다. 1868년(34세)에 교황 비오 9세가 미국에 노스캐롤라이나 대목구(代牧區)[4]를 설정하고 제임스를 첫 대목구장으로 선택하였으므로 그해에 주교로 서품받았다.[5] 이듬해(1869)에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가 개최되었으므로 참석하였는데, 제임스는 참석자들 중 최연소 주교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교황권을 중심으로 그 일치구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내외정세에 대해서 가톨릭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임스 주교가 바라보기에 미국 개신교단이 자기분열하는 모습은 신앙의 정통에서 멀어졌음을 증명하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또한 사목자로서도 개신교 종특이나 다름없던 가톨릭 까기에 맞설 필요가 있었다.

1872년 1월에는 리치몬드(Richmond) 교구의 교구장서리를 겸임하고, 동년 6월에는 대목구장 직위를 내려놓고 리치몬드 교구의 4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

처음 제임스가 대목구장으로서 사목한 노스캐롤라이나 가톨릭 신자가 겨우 700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개신교가 강세였다. 제임스는 주변 개신교 예배당을 뛰어다니며 근성으로 많은 개신교인들을 가톨릭 신자로 개종시켰다. 그러나 기존의 서적들로는 갓 입교한 개신교 출신 가톨릭 신자들을 이해시키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제임스는 저서 ≪ 교부들의 신앙≫을 집필하여 (리치몬드 교구장으로 재임하던) 1876년(42세)에 출판하였다. 제임스가 저서를 ≪교부들의 신앙≫이라고 이름한 데서도 가톨릭의 정통성을 얼마나 확신했는지 알 수 있다. '가톨릭교회야말로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신앙을 계승하였고, 개신교는 여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를 담은 제목이다.

1877년(43세)에는 고향 볼티모어 대교구의 9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여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간 사목하였다. 볼티모어 대교구장으로 재임 중이던 1886년(51세)에는 교황 레오 13세가 제임스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그 외에도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미국 가톨릭 대학교의 초대 학장이 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여, 당시 미국 가톨릭교회에서 존경받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제임스는 1921년 3월 24일, 향년 86세로 사망하였다. 리치몬드 교구장이 된 지 43년, 신부가 된 지 60년 만이었다.

제임스 추기경의 묘는 본인이 사목하던 볼티모어의 성모승천 국립 대성당(Basilica of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에 있다.

3. 활동

4. 여담


[복수전공] [2] Archbishop of Baltimore [3] 아일랜드는 골수 가톨릭 국가이다. 反 영국 독립투쟁 때 가톨릭이 사실상 국가 정체성 역할을 하였다. [4] 현 롤리(Raleigh) 교구의 전신이다. 롤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주도. 대목구는 영어로는 Apostolic vicariate라고 쓰는데, 정식으로 교구를 설정하기 전에 임시로 정하는 관할구역이다. [5] 당시 미국 가톨릭교회가 선교지역임을 감안하여도, 대체로 해당지역에 정착하여 안정궤도에 오른 교회의 주교 서품 나이가 빨라야 40대 이상이다. 30대 주교는 당시나 지금이나 교회에서 전례를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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