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320><tablebordercolor=#ffffff,#1f2023> |
HL그룹 회장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20deg, #000 75%, #00b4ed 75%)" {{{#!wiki style="color:#ffffff; 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정인영 (1962~1996) |
제2대 정몽원 (1996~ ) |
}}}}}}}}}}}} |
<colbgcolor=#020a0a><colcolor=#ffffff> HL그룹 초대 회장 정인영 鄭仁永|Chung In-yung |
|
출생 | 1920년 5월 6일 |
강원도 통천군 | |
사망 | 2006년 7월 20일 (향년 86세) |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하동 정씨 (河東 鄭氏)[1] |
호 | 운곡(雲谷) |
직업 | 기업인 |
학력 |
조선중앙기독교회관 (영어과 / 졸업) 아오야마가쿠인 (영어학 / 중퇴) |
부모 |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 |
형제자매 |
형
정주영 남동생 정순영, 정세영, 정신영, 정상영 여동생 정희영 |
배우자 | 김월계(1923년~2003년) |
자녀 |
장녀 정형숙(1951년~1974년) 장남 정몽국(1953년생) 차남 정몽원(1955년생) |
병역 | 미군 통역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HL그룹 초대 회장.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첫째 동생이자 정순영[2], 정세영, 정상영[3]의 형이다. 자세한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범현대가 문서 참조.
2. 생애
14살에 서울특별시로 올라와 야간 YMCA 영어과에서 2년 동안 공부한 뒤 일본으로 유학,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야간 영어과를 다니다 2학년을 중퇴하고 귀국,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1950년, 6.25 전쟁으로 가족들과 함께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도중 미군 사령부 통역 모집 광고를 접하고 지원하며 미군 공병대 매카리스트 중위의 통역으로 근무하였다. 미군 공병부대 장교 통역 생활을 하면서 일종의 정경유착으로 미군 발주 공사를 형 정주영에게 연결하여 현대건설이 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전쟁이 끝난 1953년에 현대건설에 합류하여 부사장직을 역임하며 1965년, 태국의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1971년 베트남 공사 등을 수주하며 정주영을 보필했다.
현대건설 부사장을 하던 도중인 1962년,“부존자원 없는 나라에서 중공업 개발 없이는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면서 경기도 군포에 한라그룹의 모태가 되는 현대양행을 독자적으로 설립한다. 그 뒤 1969년에 현대건설 사장, 1970년 현대아메리카 사장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1970년에 현대그룹의 중동진출에 제동을 걸며 '중동 진출 신중론'을 펴며 정주영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1977년, 현대건설을 떠나 현대양행[4]에 완전히 정착하며 1978년, 한라건설, 1980년, 한라자원, 1980년 만도기계[5], 1980년 인천조선 (1990년 한라중공업으로 개명, 홍보실 오일용 상무), 1984년 한라시멘트 등을 설립하며 독립적으로 한라그룹을 만든다.
승승장구하며 1996년에는 자산 6조 2000억원, 매출 5조 3000억원, 종업원 2만여명이 딸려 있는 자산총액 기준 12위의 재벌로 성장했다. 그러나 은행대출에 의존한 무리한 확장으로 부채비율이 무려 1000%에 달하는 상황에서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자 심각한 자금난에 빠지면서 공중분해 직전 상황까지 몰린다. 이후 상당수 계열사와 부동산을 외국에 매각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그룹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참고로 한라그룹은 2013년 공정거래위원회 발표에서 자산총액 7조5000억원으로 공기업을 제외한 ' 출자총액제한 기업집단' 순위에서 39위에 올랐다.
그 뒤 차남 정몽원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나서 명예회장으로 지내다가 2006년 7월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3. 직장 생활
그는 비즈니스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이기 때문에 정감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소소한 거래처나 이해관계자라 해도 서신을 주고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198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1990년대에는 연간 200일 가까운 해외출장을 감수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재계의 부도옹( 오뚝이)'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2018년 만도에서는 휠체어를 타게 된 장애인들에게 휠체어를 지원하는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
열심히 하고 능력 있는 사람은 뛰어난 아랫사람의 지위에 남겨 두지 않고 초고속 승진시켰다. 대리 경력직으로 입사해서 5년 만에 상무를 달았던 사례도 있다.[6] 이런 고속 승진에 대해 기존 직원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묵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