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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정옥영(鄭玉英)[1] |
출생 | 1922년 10월 11일 |
평안북도
선천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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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9년 5월 24일 (향년 86세) |
본관 | 진주 정씨 |
군경력 |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 대원(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 韓橋戰地工作隊 隊員) [2]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290호[3]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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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일범의 처(妻)로 한국광복군 여군이다.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독립운동
정영은 1922년 10월 11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특파원 이일범(李一凡)의 아내로, 1942년경 남편과 함께 난징에서 지하공작을 수행했다.그러다 1943년 난징 중앙대학교 송지영 사건으로 인해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체포된 위기에 몰리자 안창호 선생의 비서인 유찬희 선생의 아들 유기석(柳基石)[4]의 안내로 17명의 동지와 같이 탈출해 광복군 징모 제 3분처 한교전지공작대에 합류한 뒤 활동하다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일범 형이 난징에서 일가족을 인솔하고 상하이로 와서 홍커우쪽 만세장에 거처를 정하고 찾아왔다. 이일범 형은 1944년 4월에 제 3전구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동지규합을 위하 난징에서 온 유수인(유기석)과 내통하여 동지 17명과 같이 난징을 탈출했다. 동년 5월에 제 3전구 허커우(河口)에 가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이 패망한 후, 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재당 이소민 상교의 신임을 얻어 동대 난징지구 특파원으로 부임하여 소임을 수행하고 이제 귀국길로 찾아 상해로 왔던 것이다.[5]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함께 1946년 3월 4일, 상하이에서 미군정에서 제공한 L.S.T.상륙정을 타고 3월 13일, 부산항에 귀국했다고 한다.[6]
3. 해방 이후
1952년 3월 20일 부군(夫君) 이일범 경무관, 대남간첩단 사건[7]으로 이일범, 김용, 신영묵 등 광복군 출신 경찰이 체포되어 기소된다. 그 해 5월 27일 무죄가 언도되었지만 특무대장 김창룡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이일범의 아내로 옥바라지 했다고 한다.비록 무죄판결을 받았어도 그 당시 북한 간첩으로 낙인이 찍히면 재취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동생인 정영호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연명하다가 이후, 1970년대 미국 애틀랜타 주로 이민 후, 2009년까지 여생을 보내다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