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정병용(鄭炳庸) |
일본식 이름 | 三山炳庸 |
생몰 | 1890년 8월 27일 ~ 1960년 2월 19일 (향년 69세) |
출생지 |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
사망지 | 전라남도 담양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정병용은 1890년 8월 27일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2년 4월 전남 담양군 수북면 개량사숙기성회 발기인, 1923년 1월 민립대학기성회 발기 총회 발기인, 같은 해 3월 동아일보 담양분국 분국장, 4월 민립대학 발기 총회 담양군 위원, 1924년 10월 담양군 소작인연합회 위원으로 활동했다.1925년 1월에는 담양청년회 순회 강연회 강사 및 집행위원, 같은 해 2월 이월회 집행위원, 해방운동자 조사위원, 전남청년대회 준비위원, 같은 해 4월 동아일보 담양지국 지국장, 조선노농총동맹 준비위원 및 전남기자대회 집행위원,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준비위원, 같은 해 8월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선정위원, 12월 동아일보 담양지국 기자로 활동했다.
1926년 2월 담양농민조합연맹 서무부 위원,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집행위원, 3월 전남노동연맹 순회위원, 5월 담양노동연맹 위원, 7월 담양사회운동단체연합회 제정위원, 9월 담양청년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담양사형사건에 연루되어 구류 처분을 받았고, 같은 해 11월 담양노동조합연맹위원회 신임위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1월 서울에서 노동운동사 간사, 3월 담양청년회 위원장, 4월 동회 집행위원 및 전남청년연맹 부의장, 7월 전남 광주군에서 조선공산당 담양야체이카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미결 500일 산입)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농민총동맹 중앙위원 후보, 12월 담양정미노동조합 교섭위원으로 활동했다.
1928년 1월 담양노동조합연맹 집행위원장, 2월 조선일보 담양지국장 및 신간회 담양지회 임시의장, 3월 담양노동연맹 중앙집행위원회 임시집행부, 1929년 1월 담양노동연맹 회장, 5월 신간회 담양지회 간사로 활동, 1931년 10월 담양노동조합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32년 5월 출옥했다. 그러나 1933년 3월 장성협동조합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몇달간 고초를 겪었다. 이후 담양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0년 2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정병용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