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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 대구광역시에 위치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도굴한 것으로 전해지는 납석사리호.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741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높이 8.3㎝, 구연부 지름 8.0㎝, 밑지름 8.5㎝.신라 경문왕 3년인 863년에 대구광역시 동화사에서 만들어진 납석사리호로, 당시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의 삼층석탑 안에 장치했던 것을 훗날 1966년에 도굴꾼들이 도굴했다가 문화재청으로부터 정의구현을 당하고 다시 회수된 것이다.
원래는 위의 금동제사방불판(金銅製四方佛板) 속에 안치되어 있었다. 도굴꾼들이 도굴하는 과정에서 금동사리함은 위와 같이 4개의 금동판으로 분해되었고, 그 안에 들어있던 납석사리호 역시 일부분이 파손되었다. 현재 이 금동제사방불판 4점은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도굴 직후 1967년에 탑을 해체하여 복원 공사를 하던 중, 사리공 내부에서 사리기를 안치했던 흔적과 함께 소형 도금목탑 3기가 따로 발견되었다.
납석사리호의 경우 몸체 외면에 가로와 세로로 칸을 구획하고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는데, 이 명문에는 민애대왕에 관한 소개와 함께 경문왕이 민애대왕을 위하여 탑을 건립한 내용과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명문을 통해 사리구의 제작 유래 및 제작 시기(863년)를 파악할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 사리구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신라시대 공예사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1982년 12월 7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
- 두산백과 : 민애대왕석탑사리호
- 한국어 위키백과 :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
- e뮤지엄 : 민애대왕석탑사리호
- 한국 미의 재발견 - 금속공예 : 대구 동화사 비로암삼층석탑 사리장엄구
4. 보물 제741호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는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이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구연부 지름 8.0㎝, 밑지름 8.5㎝이다. 현재는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추정된다.
구연부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렀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또한 경문왕 3년(863)에 탑이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하였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구연부 지름 8.0㎝, 밑지름 8.5㎝이다. 현재는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추정된다.
구연부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렀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또한 경문왕 3년(863)에 탑이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