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5:51:00

재이론

1. 개요2. 내용

1. 개요

災異論.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사상. 하늘의 벌은 천재지변, 그러니까 홍수, 가뭄, 흉작, 돌림병, 지진 등의 자연재해를 말한다. 유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 내지 천인감응(天人感應) 사상을 근거로 두고 있으며 인간의 행위를 통해 자연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관점이다. 쉽게 말하자면 임금이 잘못하면 하늘이 노한다!는 주장으로, 자연재해를 군주의 실정과 연결시키는 믿음이다. 사실 유학의 영향으로 생겼다기보다는 동서고금 어디서나 유구하게 이어져온 사상이다.

동아시아에서는 한나라 대에 동중서가 하늘이 덕을 잃은 군주에게 재이(災異)를 내려 벌을 준다는 천견설, 그리고 인간과 하늘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음양의 기를 통해 하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한다는 천인감응론을 결합시켜 체계화했다. 이때 재이는 군주권이 하늘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하늘이 군주에게 내리는 경고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송나라 대에 주희는 천문학의 발달로 인해 일식 월식이 하늘의 뜻에서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자연 현상으로 끌려내려오며 이를 재이로 간주하지 않는 경향을 수용하였고, 이는 근본적으로 이치에 의해 설명되기 어려운 자연 현상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재이론의 무력화는 당시 신하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던 명분 하나를 없애는 것이었기에 이를 대체할 이론을 골몰했고, 그 결과 군주의 잘잘못에 따라.하늘이 자연 현상을 일으킨다는 전반적 대응설을 제시해 재이의 사회적 수명을 연장시켰다. 쉽게 말하면 옐로카드에서 상벌점제도로 바뀐 것.

2. 내용

고대 군주들은 종교적 지도자이자 정치적 지도자를 겸하는 사제왕이었으며, 대개 자연을 다스리는 최고위 신인 천신의 자손으로 여겨졌다. 민중들은 우리 임금님께서는 신의 힘을 물려받으셨으니 우리를 위해 기상기후를 평화롭게 해주실 거야!라는 기본적인 믿음이 있었으며, 이것이 군주의 권력 근본이 된다.

그런데 홍수나 가뭄 따위로 농사가 안 되거나 역병이 돌아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이걸 죄다 임금 탓으로 돌려버려서 지위 격하의 구실로 삼았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 편이 대표적인 예인데,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곡식이 영글지 않으면 그 화를 왕에게 돌려 왕을 죽이거나 바꾼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만 봐도 왕의 말년에는 항상 자연재해가 일어났다. 혁거세 거서간 때의 일식, 남해 차차웅 때의 전염병, 유리 이사금 때의 혜성 등. 거의 무슨 복선 수준이다. 나라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왕의 힘이 거의 다해간다→새로운 왕을 모실 때가 되었다의 논리. 구약성경만 봐도 재이론이 등장한다. 다윗 호구조사 한 번 잘못했다가[1] 야훼의 진노를 사 사흘 동안 나라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7만명이 죽어나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재해 대비 인프라가 갖춰진 21세기 대한민국에도 항상 홍수나 가뭄, 태풍 따위는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고대~근세 사회야 오죽하겠는가. 결국 재이론은 자연 이상을 구실 삼아 군주를 견제하려는 신하들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대놓고 군주의 잘못을 까기는 어려우니까 성현들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해서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군주의 입장에서도 재이론이 그렇게 불편하기만 한 것은 아닌데, 그만큼 군주의 권위를 뒷받침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군주가 실정을 저지르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논리는 결국 하늘과 군주가 연결되어 있다는 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재이론은 조선에서 구언(求言)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이는 재해가 닥치는 것은 군주에게 문제가 있으니 군주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기탄없이 의견을 말해보라고 말하라는 것으로 보통은 문제가 될 말들도 구언이 내려졌을 때는 넘어가지는 경우가 많았고,[2] 때문에 신하들 입장에서는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넘어가는 경우가 많을 뿐이지 반드시 넘어가는건 아니라서 효종이 황해감사 김홍욱[3]을 죽인 일이 있다. 또한 재변이 내리면 어쨌든 이건 다 뭔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서 숙청 혹은 그 반대의 논리로 써먹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을사사화 당시 권벌은 재해가 일어나 억울한 사람이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며 윤임을 옹호하자 문정왕후는 반대로 재해가 일어난 지는 오래 되었으니 그보다는 간인들[4]이 활개치고 다녀서 그런 것 아니냐며 반박했다.

여담으로 유교문화가 남아 있는 현재의 한국에서 재해가 일어나면 이따금씩 반농담삼아 '이게 다 (대통령/정치인/정당 이름)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말도 나오는데, 이걸 보면 재이론은 여전히 과학이 발달한 현재에도 살짝 남아있는 듯하다.[5]


[1] 성경에서는 사람은 신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호구조사는 신이 아니라 사람의 힘을 믿는 것으로 간주되는 행위이다. 그나마 야훼가 시켜서 한 일이면 문제가 되지 않으나 다윗은 자기 멋대로 한 일이다. [2] 정 듣기 싫으면 안 받아들이고 말았지 말했다고 벌하는 일은 적었다. [3] 효종 초창기 최강의 권력자였던 김자점 탄핵한 인물. [4] 문정왕후 입장에서 보면 윤임, 유관, 유인숙 등 [5] 자연재해 중에 인재(人災)가 원인인 경우도 꽤 있기에 아주 터무니없는 말도 아니긴 하다. 이를테면 오세이돈이라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