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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ean-Baptiste Colbert(1619 ~ 1683)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경제관료. 이름에서 나타나듯 스코틀랜드계 이민자다.[1]
2. 상세
랭스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전쟁장관이자 인척이었던 미셸 르텔리에(Michel le Tellier)의 중개로 관직에 진출했다. 이후 루이 13세 때 재상 쥘 마자랭에게 발탁되어 그 측근이 되었으며, 루이 14세가 옥좌에 앉은 이후 재무장관 푸케의 독직 사건을 적발, 그를 징계하고 그 후임에 올랐다.그는 재무장관이었지만 재정 이외에도 상공업 · 농업 · 토목 · 식민 문제 · 해군의 업무를 담당, 거의 재상과 같은 권력을 휘둘렀다. 특히 경제 개혁에 주력해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국부를 증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당시 모든 유럽 국가들의 금, 은 보유량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국부를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중상주의에 바탕을 두고 무역을 통하여 금, 은의 보유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자국의 상선을 증가시키는 한편, 국내 생산을 부흥시켜 수출 진흥에 힘썼다.
프랑스령 캐나다 식민지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게 된 것도 콜베르 덕분이다. 하지만 중상주의적 관점에서 캐나다 식민지를 취급했기 때문에 큰 성장은 하지 못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캐나다 식민지는 매력있는 땅이 아니었다. 날씨 따뜻하고 먹을것도 풍족한 프랑스에 비해 캐나다 식민지는 춥고 먹을 것도 부족했던 땅이었다. 캐나다 식민지를 부유하게 한 모피 무역은 콜베르 사후에 활발해졌지만, 그래도 프랑스 본국으로부터의 유입 인구는 적었다. 인구로 보면 1650년의 인구가 200명이었는데 1750년이 되어서야 1만명을 찍었다.
또한 길드의 재편성을 단행하고, 왕립제작소를 창설하여 공업을 육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물질적으로는 도움이 된 반면 심한 규제로 상업발전를 저해하였으므로 1670년경부터는 차차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 1683년 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3. 여담
콜베르가 했다는 말로 알려진 "최고의 징세 기술은 거위가 비명을 적게 지르게 하면서 거위 털을 가장 많이 뽑는 것과 같다."가 있다. 이 때문에 콜베르는 세금을 철저하게 뜯어먹는 징세꾼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발언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거위의 고통을 덜하는, 즉 세금 징수로 인해 국민이 겪는 고통을 줄이는게 중요함을 말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1685년에 공포된 흑인(노예)법의 제정에 기여했기 때문에 (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에 의해 촉발된) 아다마 트라오레 추모 시위에 의해 국민의회 앞에 있는 장 바티스트 콜베르 석상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중상주의자였던 콜베르는 프랑스의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해 외국에 수출할 경쟁력을 갖춘 양질의 제품을 만드는 상공업을 적극 진흥하는 정책을 폈다. 루이비통, 샤넬, 에르메스 등 프랑스의 주요한 명품 기업들이 모두 소속돼있는 프랑스 최대의 명품 업체 연합 협회인 코미테 콜베르도 바로 프랑스의 상공업을 진흥시킨 콜베르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단체이다. 콜베르티슴과 코미테 콜베르: 명품 브랜드를 보호하는 강력한 울타리
[1]
실제로 생전에 본인도 자신을 스코틀랜드계 이민자로 소개한 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