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프랑스 민주연합 대표 장 아드리앵 프랑수아 르카뉘에 Jean Adrien François Lecanu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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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cc><colcolor=#fff> 출생 | 1920년 3월 4일 |
프랑스 루앙 | |
사망 | 1993년 2월 22일 (향년 72세) |
프랑스 뇌이쉬르센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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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루앙 시장 (1968 ~ 1993) 법무장관 상원의원 하원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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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민주연합의 초대 대표로 활동한 중도 성향의 정치인.2. 생애
1920년 루앙에서 태어났다. 르카뉘에는 콜레주 벨퐁에서 처음 교육을 받고 장바티스트 드 라살 기숙학교, 루앙의 리세 코르네유, 파리의 리세 앙리카트르를 거쳐 1942년 졸업장을 받았다.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계속되던 도중이었는데 그는 지하 레지스탕스 조직에 참가했으며 1944년 독일 국방군에 체포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파리 해방 후 그는 정보부 총감이 되었고 대중공화운동에 입당한 뒤 여러 장관들의 비서실장이나 실무 책임자를 맡았다.
1951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그는 31세의 나이로 자신이 태어난 센앵페리외르[1]의 하원의원이 되었다.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에드가르 포르 내각에서 대외관계 부문 국무차관으로 재임했다. 1956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낙선한 뒤 국사원의 전문직원으로 활동했다. 1958년 5월 14일부터 6월 1일까지 피에르 플림랭 내각에서 자문위원을 맡았다.
제5공화국 출범 후 열린 총선에서는 낙선했으나 1959년 센마리팀의 상원의원이 되었고 1960년 원내대표가 되었다.
196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폴 레노 前 총리의 지지를 받아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선거운동에서 제3의 길을 표방했으며 선거운동을 취재한 언론인들은 그를 프랑스의 케네디(Kennedy français)라고 불렀다. 대선에서 그는 15.57%의 득표율을 얻으면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1966년 민주중도가 출범하면서 민주중도의 대표가 되었다. 1968년 지방선거에서 루앙의 시장으로 선출되어 1993년까지 재임했으며 루앙의 시민들은 그를 장 왕(le roi Jean)이라고 불렀다. 또한 피에르 베레고부아의 형제인 미셸 베레고부아가 그에게 도전하기도 했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1974년 조르주 퐁피두의 서거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는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을 지지했으며 새로 출범한 자크 시라크의 내각에서 법무장관이 되었다. 1976년 레몽 바르 내각이 출범한 뒤 국토계획 부문 국무차관으로 임명되어 1977년까지 재임했다.
1978년 프랑스 민주연합이 출범하면서 초대 대표가 되었다. 1986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이후 시라크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에게 르카뉘에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으나 미테랑은 이를 거절했다. 같은 해 9월 28일 하원에서 물러난 뒤 10월 2일 상원으로 복귀했고 외교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1992년 재선에 성공했으나 암이 진행되면서 쇠약해졌고 1993년 2월 22일 뇌이쉬르센에서 사망했다. 향년 7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