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22 04:33:51

임병국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임병국
任秉國[1]國으로 등재돼 있다고 한다. 장흥임씨대동보 권2 734쪽 참조.]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만오(晩悟)
본관 장흥 임씨(長興 任氏)[2]
출생 1882년 6월 1일
전라도 보성군 율어면 진천리
(現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율어리 참샘마을 206번지)
사망 1957년 11월 25일[3] (향년 75세)
전라남도 보성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857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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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2년 6월 1일 전라도 보성군 율어면 진천리(現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율어리 참샘마을 206번지)에서 아버지 유담(柳潭) 임사년(任思年, 1848. 1. 20 ~ 1917. 2. 19)과 어머니 남평 문씨(1852. 6. 19 ~ 1912. 7. 12)[4]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908년 4월 안규홍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진을 창설하자, 입대하여 장재모(張載模)· 송경회(宋敬會)·손덕호(孫德浩)· 정기찬(鄭奇贊)과 함께 좌·우익부장(左右翼副將)에 임명되었다.

이후 보성군 송곡면 파청리(現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파청마을)에서 일어난 파청대첩(巴靑大捷), 보성군 봉덕면 진산리(現 보성군 문덕면 구산리 진산마을)에서 일어난 진산대첩(眞山大捷), 보성군 복내면 원봉리(現 보성군 복내면 복내리 원봉마을) 원봉산(圓峰山)[5]에서 일어난 원봉산전투 등에 참전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8년 8월 순천군 병치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전과를 올린 후 곧 보성군에서의 의병운동에 한계를 느꼈고, 고흥군· 장흥군 등으로 근거지를 옮겨 활약했다. 1909년 7월 토미이시(富石)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보병 제20연대가 안규홍의 부모님과 형제를 이용해 회유공작을 펼쳤고, 이에 안규홍 의병진은 우선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임병국은 피신해 귀향했다.

이후 은거하다가 1957년 11월 25일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별세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0년 10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호적에는 [2] 문헌공파-국담공파-첨지공파 24세 호(鎬) 항렬. 족보명은 임민‎호(任珉鎬). [3] 장흥임씨대동보 권2 735쪽에는 5월 20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 [4] 문학렬(文鶴烈)의 딸이다. [5] 비봉산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