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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고려)

고려 초기의 인물로, 고성 이씨의 시조이다.

『고성 이씨 명현 열전(名賢列傳)』에 따르면, 중국 전한 문제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던 이반(李槃)이라는 사람이 있었다.[1] 고성 이씨의 구전(口傳)에 따르면 이반은 춘추전국시대 인물인 노자(老子)의 후손이라고 한다. 기원전 109년에 한 무제(전한) 조선을 침략할 때, 이반의 후손[2]이 도호원수(都護元帥)가 되어 우리나라에 왔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눌러 살게 되었다. 이황(李璜)은 그의 24세손이라고 하나,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고증할 수가 없다고 한다.[원문] 1세대 차이를 평균적으로 30년으로 잡으면, 전한 문제 때 사람이라는 이반과 고성 이씨 시조인 이황의 연대차가 약 720년이 나와야 하나, 실제로는 두 시기의 차이가 무려 1,200년에 육박한다.

이황은 고려 덕종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였다고 하며,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과는 동명이인이다. 덕종 2년(1033) 1월에 거란군 일부를 사로잡은 일로 1등급 진급하였으며, 문종 17년(1063) 4월에는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다. 이후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졌다고는 하나, 밀직부사였던 일과 철령군에 봉해진 일은 정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일부 문헌에서는 이황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登第隱不仕]고 하기까지 하지만, 그가 관직에 이미 있었으며 끝내 호부상서까지 이른 것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좌우위(左右衛) 맹교위(猛校尉) 오행(吳幸), 이황(李璜), 신선립(申先立) 등이 거란(契丹)의 군사 7인을 사로잡아, 관직을 1급씩 하사하였다.
左右衛猛校尉吳幸·李璜·申先立等, 抄掠丹兵七人, 賜職一級.
고려사 권 5 세가 권 제5, 덕종 2년(1033) 1월 28일 을미
이황(李璜)을 호부상서로, 박희중(朴希仲)을 섭(攝)공부상서로 임명하였다.
李璜爲戶部尙書, 朴希仲攝工部尙書.
고려사 권8 세가 권 제8, 문종 17년(1063) 4월 30일 신축


[1] 바이두에서 찾거나 구글링을 해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정말로 이름 없는 평민이었거나, 아니면 전형적인 조상 숭배의 결과로 나타난 가공 인물일 것이다. [2] 시기상 대략 손자, 증손, 또는 멀리 가야 현손이었을 것이다. [원문] 遺乘云, 漢文帝時, 李槃中書舍人. 漢武討朝鮮時, 槃後孫, 以都護元帥, 出來仍居焉. 槃後二十四世孫璜, 而玄遠不可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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