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니가와 코힌(仁川洪彬) |
본관 | 인천 이씨[1] |
출생 | 1923년 6월 23일 |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삼인리 259번지 | |
사망 | 1975년 5월 22일 |
전라남도 광주시 서석동 자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56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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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23년 6월 23일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삼인리 259번지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아버지 이순흠(李淳欽, 1901. 9. 29 ~ 1972. 12. 6)[2]과 어머니 연안 명씨(延安 明氏)[3]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거주하였고,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1년 2월 15일, 같은 학교 학생 권쾌복· 배학보· 문홍의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부 대봉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소재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인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앞서 결성되었던 교내 항일학생조직인 '문예부(文藝部)'와 '연구회(硏究會)'가 회원들 다수의 졸업으로 해체될 형편에 있었으므로 이를 계승·발전시켜 조직을 확대·개편한 단체로서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하여 조국독립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다혁당은 교내조직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넓혀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그는 연구부원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엄수 및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 지도 등을 당의 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그해 5월까지 세 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또한 이들은 민족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주로 일본인인 교내 연습과 학생과 대부분 조선인인 심상과 학생에 대한 학교 측의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4] 그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서야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100일 통산)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였으나 공소가 기각되었다. 그는 또 상고하였으나 1944년 3월 2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곧 출옥하였다.
1952년 당진중학교 교사, 1962년 전남여자중·고등학교 교사 등으로 근무했고,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서훈되었다.
이후 1975년 광주문화방송 심의실장로 근무하던 중 그해 5월 22일 전라남도 광주시 서석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89년 11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으며, 사후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