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23:07:00

이형익


1. 개요2. 행적3. 유명해진 이유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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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李馨益
생몰년도 미상

조선 인조 시기의 어의.의 탈을 쓴 돌팔이.

2. 행적

대흥 사람으로 유응형의 어머니에게 침을 놔줬다고 하며 당시 지방에서 번침[1]으로 유명해진 뒤 1633년에 내의원이 추천해서 어의가 되었고 인조는 그를 신뢰해서 10여 년 동안 곁에 두고 자주 번침을 맞았다. 왕의 수석 주치의로서 일한 것이다.[2]

그의 번침술을 대신들이 사술이라고 여겨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고 1645년에 병을 치료할 일로 소용 조씨의 어머니 집을 왕래했는데 이 일로 추잡한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1648년에 김포군수에 임명되었고 1649년에 인조가 앓아 누워서 평소 그래 왔듯이 침을 놓았으나 직후 인조는 사망했다. 은근히 킬러다. 주위에서 그를 사형에 처하라고 탄핵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경원부로 유배를 갔다. 1651년에 장렬왕후가 위독하자 특명으로 사면받아 부름을 받았다.

3. 유명해진 이유

소현세자 독살설에 자주 등장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왜냐하면 소현세자가 사망할 당시 치료를 담당한 의사가 그였기 때문이다.

다만 소현세자 항목에도 서술되었듯 독살설은 학자들 간에도 왈가왈부가 있는 얘기라 이형익 옹호론 입장에서 보자면 이형익은 귀국길에 위중해진 소현세자의 병세가 잡히지 않자 중도에 투입된 의관으로, 탕약이 효험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응급조치로 번침을 놓아 일시적으로 증세를 호전시켰으나 소현세자는 한 달 뒤에 다시 병이 도졌고 이때 다시 침을 맞았을 때는 차도를 보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즉, 실록이 승정원일기 등과 달리 세자가 귀국 전부터 몸이 그닥 좋진 않은 환자 상태였고 이형익의 치료로 한달 전엔 증상이 오히려 호전된 부분을 기록하지 않고 사망 직전 침을 맞은 기록만 남기는 바람에 이형익에게 침을 맞고 급사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생성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음모론적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신뢰를 얻고 진짜 독살했다는 식으로 정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라 증거도 증인도 뭣도 남지 않은 오늘날 와선 결국 진실은 저 너머에긴 하다.

4. 여담

독살설 같은 자극적인 얘기가 스토리텔링에는 훨씬 유용하기 때문인지 많은 창작물에서 배후의 명령을 받아 행동하는 사악한 인물로 묘사되어서 나오는 편이다. 예를 들어 소용 조씨 인조의 명령을 받고 소현세자를 죽이는 데 일조했다든가... 물론 역사적 팩트로 확정된 건 없는 창작일 뿐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자. 진짜 아니라면 본인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최근 사료로 소현세자 암살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반영한 건지 2023년에 방영한 드라마 연인에서는 소현을 암살한 것이 아니라 소현이 이형익의 침을 맞은 후 잠시 기운을 차렸다가 사망한 것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인조는 역사대로 강빈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소현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하자 김자점에게 '왜 그런 소문이 나게 하냐'는 핀잔을 듣게 된다. 이형익이 소현을 암살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인조는 소현 가계를 못미더워하고 끝내 청산한다.
[1] 침을 불에 담가 놓는 것 [2] 인조가 이형익을 신뢰한 것은 확실하다.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은 상태에서 그가 병에 걸렸는데 이 때 봉림대군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일을 이형익에게 맡겼다. 당시 인조는 원래는 소현세자의 장남인 이석철에게 돌아가야 했을 후계자 자리를 어거지를 써 가면서 봉림대군에게 줬고 그 과정에서 신하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던 걸 감안하면 봉림대군이 병에 걸린 것은 크나큰 위기였기 때문에 반드시 명의를 붙여줘서 치료했어야 했는데 그 때 붙여준 의원이 이형익이었으니 신뢰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봉림대군은 이형익의 치료를 거부했고 신기하게도 얼마 안 가서 그냥 몸이 나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