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02 13:20:47

이항진(1898)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한산 이씨
출생 1898년 4월 26일
황해도 해주군 서변면 지동리[1][2]
(현 황해남도 해주시 신광리)
사망 1928년 2월 7일 (향년 29세)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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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항진은 1898년 4월 26일 황해도 해주군 서변면 지동리(현 황해남도 해주시 신광리)에서 어머니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해주군 지방의 젊은 유지(有志)로서 1919년 3.1 운동 당시 운동 자금을 지원하면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출옥 후 재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같은 해 9월 10일 신천군 초리면에서 군중들을 규합했는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 경찰에 의해 5명이 사살되고 그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차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 1920년 4월 7일 해주청년회가 창립되자 창립위원에 선임되어 청년회 활동에 참가하였던 그는 1920년 8월 대한독립단 단원들이 일제 부역자인 은율군수(殷栗郡守) 최병혁(崔丙赫)을 처단할 때, 독립단원들의 단원들의 은신처 및 거사 계획·연락 장소로서 자신의 집을 그들에게 제공하면서 항일투쟁에 가담하였다.

같은 해 5월 25일 그는 어머니와 상의하여 1919년 흉작으로 인해 가계에 곤란을 겪는 이웃 30여 가구에 도정하지 않은 벼와 밀 수십석을 이자 없이 빌려주어 빈민 구제에 힘썼다. #

1921년 6월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만국개방경기(萬國開放競技)가 개최되자, 여운홍·임원근(林元根) 등 7명과 함께 조선대표 선수로 출전하여 한국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의 의지를 세상에 알렸다. 당시 한국인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의해 치러지는 극동선수권대회[3]에 선수를 파견할 계획이었으나 일제의 거부와 탄압으로 인하여 만국개방경기에만 출전할 수 있었다.

1922년 2월에는 경성부에서 이광수· 김윤경· 김기전 등과 함께 수양동맹회 창립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 그해 12월 22일 오후 7시에는 해주청년회관에서 교육연구회·해주청년회·청년회상업동지회·노동공제회원 등이 회합하여 해주민립대학 발기인을 추천할 때 이규엽(李圭曄)·김영택(金泳澤)·오교근(吳敎根)·오세탁(吳世鐸)과 함께 발기인에 추천되었다. #

그러다가 1925년 2월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으로 불의에 의해 부상당한 후 요양하던 중 상처가 낫지 않아 결국 1928년 2월 7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해주군 서변면 지동리 → 1938년 벽성군 서석면 지동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벽성군 신광리. [2] 인근의 율동리와 함께 한산 이씨 집성촌이다. [3] 아시안 게임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