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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73a3c><colcolor=#fff> 이철호 Chul Ho 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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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7년 2월 23일 |
충청남도 천안군[1] | |
사망 | 2018년 2월 26일 (향년 81세) |
노르웨이 오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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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에서 '라면왕'으로 유명한 기업가이다. 출생 당시엔 일제 치하여서 이름을 마스야마라고 사용했다고 한다.2. 일생
2.1. 전쟁고아 시절
한국 전쟁 중 부모를 잃고 고아라고 알려져있지만 미군 부대에 있을때에도 어머니는 생존했다고 인터뷰했다. 노르웨이어 뉴스기사전쟁 중 폭격으로 큰 부상을 입어 노르웨이군 야전병원에 실려가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하여 사망선언을 받고 영안실로 보내져 몇시간 동안 있었다고 한다. 전쟁중에는 아직 사망하지 않았어도 소생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 치료를 중단하기 때문에 영안실에서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몇시간동안 들었다고 한다. 거기서 의식을 회복하여 간호사에게 소리쳐서 다시 치료를 받고 소생했다.
기적적으로 살아나 야전병원에서 Arthur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마스코트가 되었다. 이후 한국에서는 지속적인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해병대 사단장 월터 슈나이더 장군이 신문광고를 내어 노르웨이에 전쟁 부상을 치료하기 위한 난민으로 갈 수 있었다.
재활치료 이후 오슬로의 포스 김나지움(Foss videregående skole)에서 수업을 받으며 고학생으로 생활했다. 화장실 비우는 일[2]을 하기도 하고 폴케테트렛 극장에서 일본인 단역 배우, 벨보이, 신문배달부 등의 잡일을 하면서 근근히 살았다. 배가 고파서 새 모이용 빵을 사다가 물에 불려 먹기도 했으며 영양실조로 쓰러져 실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1955년 11월에는 이미 노르웨이어가 능숙해져, 신문기사에서 호콘 왕의 위독 소식을 듣고 위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시절 노르웨이 부유층 딸과 서로 호감을 가져 그 여학생의 부모에게 교제를 허락해달라고 했는데, 그 집 부모가 그 다음날 곧바로 딸을 영국으로 유학보내버렸고 소식도 차단해버렸다고.[3]
당시 노르웨이는 아직 석유가 발굴되지 않았고 산업도 부실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였고 1954년은 세계 2차 대전 종전 10년도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철호는 물론 노르웨이인들도 갖은 고생을 하면서 살아갔다.
2.2. 요리사 시절
처음부터 요리사가 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배가 고파도 식당에서 일하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1950년대 후반 오슬로의 엘베바켄 상업학교에 등록했다. 학교에서는 홀멘홀렌 (Holmenhollen) 관광호텔에 조리 견습생으로 보내주었다. 설거지 담당을 맡게 되자 그는 냄비에 눌어붙은 음식물 찌꺼기를 긁어먹을 수 있어서 좋아했다.설거지를 열심히 하자 감자 깎기 담당으로 바뀌었다. 거기에는 3년째 감자만 깎고 있던 스페인 출신 견습생도 있었는데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평을 했다. 이 견습생은 감자를 깎아 찬물에 담가두었는데 사실 그게 감자 깎기 담당에게는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철호는 다음날 메뉴를 확인한 뒤 메뉴에 맞추어 감자를 올리브처럼 다듬기, 구슬처럼 동그랗게 깎기, 길쭉한 사각형으로 자르기, 종잇장처럼 얇게 깎기 등으로 손질했다.[4]
아무도 그런 걸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으며 이철호의 행동은 높은 요리사들의 일을 덜어주었다. 이철호는 6개월만에 감자 깎는 일을 그만두고 요리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3년차 감자깎이 견습생은 사표를 냈다.
엘베바켄 상업학교 측에서는 약 700만원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주었고, 프랑스로 가서 공부할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스위스로 가서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요리 공부를 했다. 60년대 중반에는 독일 뒤셀도르프 지방에서 노르웨이식 뷔페 식당을 열어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으며 주요 고객 중에는 독일 총리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노르웨이로 돌아와 스타방에르(Stavenger)에서 호텔조리 관련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요리사 면허도 땄다. 노르웨이에서는 1968년까지 홀멘콜렌 호텔과 블롬 식당에서 일했다.
2.3. 중간관리직 및 사업가 시절
1969년부터 1987년까지는 묄하우센(Møllhausen)에서 중간관리직으로 일했다. 이 회사는 식당 체인점으로, 첫번째 점포를 맡으면서 일을 시작했지만 20년간 15개로 불려놓았다. 하지만 이 기업은 1987년 덴마크 기업에 매각되었고, 이철호 역시 일을 그만두었다.1970년대 이철호는 인삼차 수입업에 뛰어들었지만 판매량은 신통치 않았고, 그 가루를 빵에다 더해서 'Mr.Lee의 인삼빵'을 만들어 손실을 최소화했다. 그 외에도 몇 번의 사업 실패를 겪었는데, '발가락 양말'을 수입했다가 수천개의 재고만 남긴 일화도 있다고 한다.
2.4. 라면 사업 성공
80년대 후반, 50세가 넘은 나이에 라면 사업을 시작했고 3년 동안 고생했으나, 한 식품기업에서 3년만에 그 맛을 인정하고 대규모 주문을 넣으면서 라면 사업이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미스터 리(Mr.Lee) 라면이 이 시기 탄생했으며, 그의 나이 52세때였다.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전 노르웨이의 '라면왕'으로 등극하는데 성공했다. 미스터 리(Mr.Lee) 라면은 노르웨이 현지 시장에서 95%의 점유율을 차지한 적도 있었다. 2007년 기준 노르웨이 전역에서 연간 2,500만 봉지의 라면이 팔리고 있다. 20년 이상 라면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미스터 리'가 '라면'을 뜻하는 대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철호가 라면을 알게 된 것은 1970년대 초 한국을 방문했을 때라고 한다. 이 때 처음으로 라면을 먹어보았는데 정말 맛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방부제 등 성분검사를 통과하고 통관 절차를 거치는 데 3년 이상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또, 노르웨이인 입맛에 한국 라면이 맞지 않았다. 너무 매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철호는 노르웨이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스를 가지고 한국의 유명 라면회사 연구소를 방문해서 연구진과 함께 스프를 개발했다. 요리사로 일한 경험을 되돌아 보니 나라마다 독특한 소스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노르웨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소스를 먼저 알아놓은 다음 거기에 맞추도록 노력했다. 처음에 한국 라면을 그대로 도입했을 때는 망했지만, 매운맛을 빼고 기름진 맛을 더해서 출시하자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
마케팅에 엄청난 신경을 썼다. 벌어들인 수익은 필요 경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홍보 비용으로 투입했으며 신문 방송에 광고를 내고, 한국 여행 경품을 걸었다. 또 라면 표지에 한글을 적어놓아 한국에 호기심을 갖게 했다. TV 광고에는 자기가 직접 나와서 한국식 명언을 말하는 광고를 내보냈다.
1989년 Rieber & Søn에 브랜드를 매각하고 상품 개발에 전념하였다. 이철호는 "내가 100살도 못 살 텐데 내가 없어도 '미스터 리' 라면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며 "동양 사람들이 자기 묻힐 묘를 만들고 죽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Rieber & Søn는 2012년 노르웨이 최대의 식품업체인 Orkla 그룹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Mr.Lee 브랜드도 Orkla가 소유하고 있다.
2006년 세븐일레븐을 통해 라면왕 미스터 리라는 이름으로 잠시 한국에 진출했으나, 당시 기준으로 비싼 가격과 노르웨이 입맛에 맞게 개조한 스타일이 한국 사람 입맛에는 안 맞았는지 이내 철수하고 말았다. 다만 라면의 자재는 농심그룹에서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국내 관련 행사에는 농심이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2.5. 이후 생애
2004년에는 한국 전쟁 참전 노르웨이 군인들을 위한 공로로 '노르웨이 왕 훈장'을 받았다.2018년 2월 26일에 파킨슨병으로 투병하던 중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3. 가족
사진 참조독일 여성 아넬리즈 비테(Anneliese Witte)와 1964년 결혼해 딸 세 명을 낳았으며 6명의 손자녀를 두고 있다. 아내는 독일 Leichilingen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로, 펜팔을 통해 서로 4년간 알고 지내다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5] 1984년 암으로 사별했다.
자신의 성씨를 남기지 못하는 것 때문에 딸을 낳는 것에 대해 대놓고 실망했으며, 이로 인해 독일의 장인 장모와 갈등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다른 서양 국가들과는 달리 여자가 결혼한 후에도 아버지 쪽 성을 이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런 남아선호사상을 포기하고 만족했다. 이철호의 뜻대로 세 딸 모두 결혼 후에도 Lee 성을 쓰고 있다.
사별 3년 후 한국인 여성 이해정과 재혼했다.
4. 관련 서적
2001년 9월 창작시대에서 펴낸 <노르웨이 라면왕 미스터 리 이야기 Be Happy>에 대해 '유령작가가 대필한 것이며 이철호 본인이 책의 출간 중지를 요청했다'는 설을 제기한 사람들이 있으나, 2001년 창작시대에서 발행된 책은 출판사와 이철호씨 본인의 정식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자서전이었다. 책에 실린 노르웨이에서의 젊은 시절 사진과 결혼 사진, 가족 사진 역시 이철호 본인이 제공한 것이며, 대필을 담당한 방송작가와 수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원고가 작성되고 본인 검토 후 책으로 출간되었다. 방한 때마다 이루어진 인터뷰 과정은 이철호씨의 부인 이혜정씨도 함께 했기 때문에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001년 창작시대에서 책이 발간된 후 이철호씨는 책의 홍보를 위해 KBS '아침마당'에 출연한 바 있다.이철호의 셋째딸이자 노르웨이 현지 기자인 이리나 리가 저술한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마'라는 책이 2011년 4월 말에 출간되었다. 현재는 '라면왕 이철호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와 있다. 그의 삶에 대한 "공식적인" 첫번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철호는 이 책의 출간 기념으로 2011년 5월에 방한하여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다.
5. 여담
- 전쟁 직후 한국을 떠난 후 한동안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고 개인적인 어려움과 고국의 사정이 겹치면서 부모님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52세에 시작한 라면 사업이 대박이 난 이후엔 한국에 여러 차례 방문하며 노르웨이와 한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 방한 중 인터뷰를 하면서 노르웨이에서 라면사업을 성공시킬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받자, 자신의 성공비결은 노르웨이에선 한국인이 되고 한국에선 노르웨이인이 되는 것 이라고 이야기했다.
-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 노르웨이 사람들은 김대중을 라면왕이 태어난 나라의 대통령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노르웨이에서 이철호의 위상이 어느정도인지 엿볼수 있는 일화다.
- 2011년 5월 자서전 출간 기념과 사업관계로 방한하였다. 5월 16일 인터파크 독자강연회, 5월 18일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기자간담회, 5월 19일 교보문고 독자강연회 등의 행사를 진행했고, 저자이자 딸인 이리나도 동행했다. 일간지 및 방송국과 활발한 인터뷰를 하고 있다. KBS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했다.5월 31일자 9시 뉴스에도 나오는 위엄을 보였다.
- 노르웨이의 아동용 그림책 <이가 아파요>를 한국어로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
- 2019년 3월 17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그의 일대기가 극화되어 방송되었다. 네이버 TV
- 노르웨이어 뉴스기사에서 그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볼 수 있다. 번역된 기사 내용은 나무위키에 반영되어 있다.
[1]
現
충청남도
천안시
[2]
당시 노르웨이 화장실들은 구조상 변기에서 떨어진 배설물들이 관을 타고 지하실의 양동이에 떨어져 고이는 구조로, 어느 정도 차면 이걸 치워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와서 비우는 구조였다.
[3]
만약 교제를 허락받고 결혼까지 하게되었다면 자수성가한 재벌 사위를 두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부유층이었다고 했으니 그 집안에서는 재벌 사위를 놓친 것이 손해는 될 지언정 후회할 일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1950년대에 하루만에 해외 유학을 결정할 정도였으면 돈이 모자란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고, 상류층의 경우는 타인종과의 결혼을 매우 꺼리는 경우가 많아서(그나마 유럽이라 그렇지 아시아 상류층의 경우 타인종이 아닌 외국인과의 결혼 자체를 꺼리는 편.) 후일담을 알게 됐더라도 후회했을 지는 미지수다.
[4]
폼 샤토 (Pommes Chateaux): 올리브처럼 다듬기. 폼 파리시엔 (Parisiennes): 동그랗게 깎기. 폼 알루멧 (Allumettes): 길쭉한 사각형으로 자르기. 폼 안나 (Anna): 종잇장처럼 얇게 깎기.
[5]
딸 이리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 것이 감동적이었으며, 항공우편이 큰 상자에 쌓일 만큼 주고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