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04:39

이척(고종, 군밤의 왕)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선 제27대 국왕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없음[1]
시호 없음
생몰년 1874년 3월 25일 (음력 2월 8일) ~ 현재
즉위 1913년 5월
재위 조선 왕세자
1875년 3월 25일 ~ 1913년
조선 국왕
1913년 ~ 현재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colbgcolor=#ffffff,#1f2023> 전주(全州)
척(坧)
부모 부왕 고종 이형, 모후 민자영
형제 안양대군 이규, 경양대군 이영
부인 왕후 김명숙
자녀 장녀 선경공주 이연(璿慶公主 李姸)
장남 왕세자 이은(王世子 李垠)
}}}}}}}}}

1. 개요2. 상세3. 행적4. 기타

[clearfix]

1. 개요

대체역사물 고종, 군밤의 왕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순종효황제에 해당한다.

2. 상세

완친왕이 태어나지 않아서 장남이지만 자영이 낳은 대군들이 조졸하지 않아 유일한 적자는 아니다. 귀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며 교육담당인 홍순목의 표현을 빌리자면 좀 둔하기는 해도 사람은 착하다. 지금 자신에게는 대원군인 조부도 있고 중전인 모후도 있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이렇게 많지만, 얘를 그냥 왕위에 올렸다가 이완용 같은 놈이 나오면 큰일나겠지 싶은 귀남의 아버지 마음으로 조선에 헌법(조선국 국제)이 생기고 삼권분립이 이루어진다.[2] 이 작품 굴러가는 게 대충 이렇다.

영특하지는 않다 해도 독커피 사건이 없어 바보는 아닌지라 스승들에게 20년 전 귀남옹 즉위 당시 조선이 얼마나 말기였는지 듣고 이해해, 인재 많기로는 선조 대 이상이라고 하는 지금 그 수많은 인재를 다루어[3] 이 정도까지 나라를 되살린 부왕을 존경하며 동시에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박규수와 더불어 한글전용의 물꼬를 텄다. 자식을 보지 못했던 원 역사와 달리 슬하에 아들과 딸이 1명씩 있다. 할아버지를 닮았는지, 아버지를 닮았는지[4]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결코 뜻을 물리지 않는 황소고집이다.

3. 행적

남자는 군대를 가야 사람 구실한다는 귀남의 강한 믿음 덕분에(?) 원자를 보고 학사장교로 임관하여 한양에서 복무했다. 집 근처에서 편하게 근무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기에 청나라의 정세가 심상치 않자 귀남에게 혹시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자신에게 선봉을 맡겨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당연히 왕실과 조정은 난리가 났고 귀남의 분부로 안양대군이 설득에 나섰으나 고집을 꺾지 않아 민자영의 부탁을 받은 대원군이 거짓으로 칭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귀남과 김옥균의 꾀로 전쟁이 아닌 출병이 되어 후방에 남았다. 이후 군부의 주장에 따르면 크나큰 공을 세워 참위(소위)에서 참령(소령)으로 쾌속 진급했다.

동생인 안양대군이 해외에 나가는 김에 공 세울 거리를 찾기 위해 아버지가 평소 어떤 곳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물어보자 과학기술 인재가 부족하다는 문제를 이야기해준다. 1898년 시점에는 군복무를 마친 상태다. 1901년에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 청의 순친왕과 함께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후 반아나키즘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온건파 무정부주의자들의 입장을 전하는 데 공을 세우면서 그 동안 귀남의 행적을 보고 배운 대로 난제를 해결하였다.

1907년, 살이 쪄서 운동할 시간이 필요한 귀남을 대신하여 비공식적으로 업무를 대행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1907년은 원 역사에서 고종이 일제의 압력으로 강제로 양위한 연도이다.

1913년, 귀남의 양위로 용상에 올랐다.

4. 기타

  • 피휘하기 위하여 군에서 복무할 때는 이척(李坧) 대신 이척(李陟)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 묘호와 시호는 임금이 죽은 뒤 붙는 것이므로 지금은 당연히 없다. [2] 물론 이 전에 이미 초야에 묻혀서 여전히 유학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판사, 검사를 만들려고 했을 때 관료들이 반발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법권 분리 및 헌법 제정을 언급한 바 있다. [3] 귀남의 생각이 어떻건, 숙청 없이 모든 파벌을 아울러 같이 가고 있으니 정답이다. [4] 정확히 따지면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아들이니 할아버지 유전일 가능성이 크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359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359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