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24 21:06:58

이창기(1923)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ffffff 이창기
李昌器[1]
로 표기되어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23년
경기도 경성부 효자동 10번지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사망 사망년도 미상
사망지 미상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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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23년 경기도 경성부 효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10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291-8번지로 이주하였다. 일찍이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하여 1941년 12월 졸업하였다.

이후 1942년 3월 출가하여 강원도 오대산 금강산 등지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1943년 10월 환속하였다. 그후 1944년 1월부터 경성부 사립 광신공업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43년 11월 초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동성상업학교 동창생인 김중일(金重鎰)[2]과 만났는데, 그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인으로 이루어진 행정관 견습을 개선하고자 1944년 1월경부터 조선의 현지 상황에 정통한 대학 또는 전문학교 교육을 받은 유식한 조선 청년을 모집하여 제2차 행정관 견습 양성 과정을 개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943년 8월 이미 제1회 행정관 견습생 양성을 마치긴 했으나, 이들 견습생은 조선을 떠난지 5~10년이 지난, 임시정부 소속의 군인들이라 현재 조선의 사정에 대해 어둡고 또한 중국식 행정법을 익혔기에 조선독립 후에 행정관으로 일하는 것은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창기는 전부터 조선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었으며, 당시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인해 강제징병을 당하는 것이 불가피하던 시기였기에 11월 중순, 김중일을 재차 만나 그의 권유에 승낙을 표했고 중화민국 충칭시로 건너가 이 과정에 지원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로 마음먹고 그와 실행에 옮길 것을 협의하였다. #

그러나 이후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1945년 7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7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행적 및 사망년월일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201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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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년 7월 23일 판결문에는 李 [2] 창씨명 : 마쓰바라 시게루(松原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