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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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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9월 7일~ 1950년 6월 27일

1. 개요2. 생애3.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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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추서.

2. 생애


1917년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에서 태어났다.[1] 본명은 이명이고 이의명은 가명으로 썼지만 전쟁기념관 전사자명부 및 6.25 전쟁 관련자료에 이의명으로 되어있어 본 문서에서는 이의명으로 기록한다.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1933년 11월 안춘생, 노태준, 김동수, 고시복 등과 함께 중국 중국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훈련을 받았고, 중국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진학해 중국군 장교로 임관했다. 1941년 한청반 훈련을 수료하였다. 그 후 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선우기, 장재민, 김중호, 구자민과 함께 제3구대 제1분대에 소속되었다. 1945년 OSS 훈련을 받고 장준하, 박승헌과 함께 국내진공작전 경기도반에 소속되어 국내진공작전을 기다리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귀국하여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고, 6.25 전쟁 당시 수도사단 제1연대 제2대대장으로 동두천 전투에서 북한군 제4사단의 남하를 방어하였다. 수도사단 제1연대 제2대대는 북한군 남침 당시 서부전선에서 제일 먼저 북한군과 교전을 한 부대이며, 이의명 대대장은 연대장 함준호 대령의 관사를 찾아 전황을 보고 후 소요산에서 북한군과 직접 교전하였다.

당시 소요산에서 북한군을 막다가 탄약 부족으로 동두천으로 밀려나고 동두천에서 시가전을 펼치며 북한군의 진격을 막다가 양주군 덕정리로 후퇴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사하였다.[2] 사후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3. 참고자료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운동사 제6권
전사자 정보 검색
[1] 전쟁기념관 전사자명부에는 서울 출생으로 되어있다. 공훈록에 천안은 본적으로 되어있어 추가적인 사실확인이 필요하다. [2] 당시 북한군 2개 사단의 진격을 막던 제7보병사단은 중과부적으로 궤멸에 가까운 병력손실이 있었고, 제1연대는 연대장 함준호 등 지휘관급 장교들이 전사하였다. 그 결과 제7보병사단은 일시적으로 해체하고 수도사단 명칭과 제1연대 명칭을 수도경비사령부 제1기계화보병여단에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