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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60c30><colcolor=#fecb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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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2년 6월 18일 | ||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북부 파다 | |||
사망 | 2021년 4월 17일 (향년 68세) | ||
차드 공화국 티베스티 주 | |||
재임기간 | 제8-12대 차드 대통령 | ||
1990년 12월 2일 ~ 2021년 4월 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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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60c30><colcolor=#fecb00> 배우자 |
지나 와주나 아메드 이드리스(이혼) 하자 하리메(이혼) 힌다 데비 이트노(2005년 결혼) 아마니 무사 힐랄(2012년 결혼)[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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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 |
장남 브라임 데비 이트노 차남 마하마트 데비 이트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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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정당 | 차드 애국구원운동당 | ||
종교 | 이슬람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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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driss Déby Itno
차드의 제8-12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31년 동안 장기집권 했던 독재자였고 폭압 통치를 일삼는 아프리카의 잔인한 학살자 중 하나로 꼽힌다.
2. 생애
차드 북부의 자가와(Zaghawa)족 유목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데비는 수단에 망명했을 때 리비아의 지원을 받으면서 반정부 세력인 애국구제운동을 결성했고, 1982년 정치적 동지인 이센 아브레와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구쿠니 우에데이 당시 차드 대통령을 축출했으며, 이 쿠데타를 통해 자신의 동료인 이센 아브레가 차드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리비아와의 전쟁에서 차량화보병을 주축으로 한 기동전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영웅으로 떠올랐다.하지만 아브레가 집권한 이후 데비는 리비아와의 영토문제를 두고 아브레와 갈등을 겪었고 결국 서로 갈라서기로 마음먹은 데비는 리비아의 지원으로 다시 애국구원운동당을 만들어 게릴라전을 통해 다시 수도를 점령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렇게 이드리스 데비는 1990년 9월 2일 수도 은자메나를 장악하고 한때 자신의 편이였던 이센 아브레 또한 다시 쿠데타로 몰아내고 1990년 12월 4일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한 뒤 국가평의회를 구성했고 이후, 현재까지 차드의 대통령으로 30년 가까이 장기집권을 했으며, 차드의 집권당인 애국구원운동의 당수로도 활동하였다.
이렇게 권력을 잡았지만 문제는 현재까지도 차드는 수많은 내전과 쿠데타를 일으키며 차드가 현재 개판이라는 점에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1998년 남부 반군과의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 내전이 끝나는 듯 했으나 1999년 다시 반군이 새롭게 일어났다. 특히 2008년 2월 3일에는 굉장히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차드 수도인 은자메나에서 수도로 진입한 반군이 이드리스 데비를 축출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차드 정부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으며, 차드 정부군은 이날 헬리콥터와 장갑차를 동원해 대통령 사무실과 관저를 방어했으며 이후 반군을 격퇴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반군 공세가 강화되면서 은자메나가 장악되어 대통령이 대통령궁에 고립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드리스 데비가 어지쩌지 막아내서 반군은 쫓겨났지만 2009년에도 차드 동부 지역에서 교전이 계속되었다고 하며, 이들 반군은 상당수가 수단에서 지원하거나 수단에 근거지를 둔 이유로 차드가 수단 몇몇 지역의 반군 거점을 폭격하는 등의 행동을 해 수단과의 외교 마찰도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이런 내전으로 인해 2008년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약 28만 5천명의 난민과 18만명의 차드 내 피난민들이 발생했다고 한다. 기사
이런 막장 내전이 지속되자 많은 사람들이 내전을 피해서 카메룬으로 건너간다고 하며 주민들의 피난이 계속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나마 차드의 내전은 2015년 현재 이드리스 데비의 통제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지만 국제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반군들의 활동과 차드의 만성적인 가난으로 인해 데비 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도 많다.
물론 그러면서도 아프리카 독재자로서의 독재 테크를 착실히 수행중이다. 그는 2005년 국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대통령 임기제한을 없애는 개헌에 성공한 뒤 2006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2006년 5월 3일 차드에서 대통령 선거 투표가 이뤄졌는데 데비는 주로 친정부 인사들인 4명의 다른 후보들과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겨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안 야당 지도자들은 지지자들에게 투표를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여담으로 이 때 차드 정부는 선거를 방해하겠다는 반군의 위협에 대비하여 차드 수도의 보안을 강화했는데, 실제로 반군들은 선거 3주 전에 데비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엔자메나를 공격하기도 했을 정도로 내전이 격화된 상태였다고.
2011년 5월 실시된 대선에서는 무려 89%의 지지율로 다시 당선돼 5년 임기를 다시 시작했다. 한편 차드 야권은 여당 애국구원운동당(MPS)이 2011년 2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선거결과를 조작한 데다 이번 대선도 부정행위로 얼룩진 만큼 선거를 거부한다고 했다.
2015년 들어서는 나이지리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반군 보코하람 소탕작전에 참여하고 있는 그는 보코하람 지도자 아부바카르 셰카우가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항복하지 않으면 쓸어버리겠다고 말하며 강력한 보코하람 퇴치작전을 펴는 중이다.
2015년에 말리 인질극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즉각 성명을 발표하고 "야만적이고 미개한 행위를 비난한다"며 "망설임 없이 말리를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2021년 4월 20일, 6연임 확정 직후 전방 군부대 시찰, 정확히는 충성서약을 받으러 갔다가 반군과 전투로 전사했다는 보고가 나왔다. 날짜는 17일 전후로 추정된다. 4월 11일의 대선승리 발표후 수시간 만이라 충격이 컸다.
정작 전투 경과는 정부군이 반군 300명을 사살하고 150명을 포로로 붙잡았으며, 그 과정에서 정부군 5명이 숨지고 36명이 부상을 입는 정도에 그쳤다.
이드리스 데비의 차남인 마하마트 "카카" 데비 이트노 육군 대장이 이끄는 군사위원회가 군정을 선언했다. 사실상 부자세습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독재자였지만 극렬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서방측의 동맹이었다는 점 때문에 장례식에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참석하기로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
3. 독재 정치
데비 정권은 악랄한 독재정치와 고문 및 학살 등을 벌여왔다. 2010년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보고서에 의하면 차드의 민간인과 인권운동가들이 살해당하거나, 납치당하고 있으며, 여성과 소녀들이 성폭행을 당해왔다. 또한 정부에 반대해온 정치 세력이 불법적으로 체포되고 있으며, 무차별적인 구금과 고문이 행해지고 있으며, 기자와 인권단체에 대한 가혹행위와 협박도 있어왔다.그러나 차드 정부군과 데비 정권이 가장 비난받는 이유는 아이들을 소년병으로 징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증언에 의하면 가끔 좋은 옷을 입힌 아이들이 돈과 담배를 가지고 새 소년병 모집을 위해 다시 캠프로 보내지기도 하며, 이들은 미국 달러로 소년병으로 자원하는 아이들에게 20달러에서 500달러 정도의 보수를 제안한다고 한다. 약 10세 정도의 어린 아이들이 주로 연락책과 짐꾼으로 이용되며 13 ~ 17세 사이의 소년들은 대부분 전투에 직접 투입된다고 한다.
이에 국제앰네스티 아프리카국 에르빈 판데르보르흐트(Erwin van der Borght) 국장은 “수천명의 소년들이 아동으로서의 삶을 빼앗기고 어른들의 전쟁에서 싸우기 위해 내몰린다는 것은 비극이다. 이 부끄러운 아동 학대가 절대로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차드 정부와 동부 차드 지역에서 활동 중인 차드와 수단 무장 단체들은 즉각 18살 이하의 소년들을 징집하고 병사로 사용하는 행위를 멈추고 즉각 소년병들을 풀어줘야만 한다.”라고 차드 정부를 비난하기도 했다. 자료 차드 군이 소년병을 모집하는 문제 때문에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는데도 미군은 오히려 차드 특공대를 계속 훈련시키고 있어서 미국에 대한 비난도 많다.
게다가 이드리스 데비는 반군을 제대로 토벌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차드군과 반군에 의해 자행된 범죄에 대한 사면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사실상 소년병 문제나 차드군과 반군이 저지른 온갖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을 무효화하는 법이라서 큰 비난을 받고 있다.
데비는 집권한 이후 석유를 포함한 자원에 대한 이권 독점과 부정부패, 인권탄압을 일삼았으며, 2006년에는 3선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면서 장기집권과 세습정치에 나섰다. 오죽하면 데비 대통령의 장기 독재와 부정부패, 인권탄압에 반발하여 데비 정권의 일부 관료들도 반군에 합류했을 정도이며 현재 차드 반군을 이끄는 지도자 중에는 마하마트 누리가 전직 국방장관이었기에 데비 대통령 정부에서 일했던 고위 관료출신들이 적지 않다. 한마디로 이드리스 데비가 저지르는 독재정치 때문에 반군은 세력이 꺽이지 않고 있어 내전이 더 격화되었고, 끝내 데비는 자신이 조장하다시피한 반군에게 목숨을 잃으며 자신의 악행의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 했다.
4. 기타
이드리스 데비는 생전의 카다피와는 꽤나 친한 관계로 알려져 차드 역시 카다피의 망명 가능 국가로 언론보도에 나오기도 했다.이드리스 데비의 장남 브라힘 데비는 2007년 프랑스 파리의 한 지하주차장에서 괴한 4명에 의해 살해당했다. 사인은 소화기의 분진에 의한 질식사.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