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5:08:47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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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기니 공화국 제2대 대통령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Teodoro Obiang Nguema Mbasogo
파일:응게마.jpg
<colbgcolor=#e32118> 출생일 <colbgcolor=#fff,#1c1d1f> 1942년 6월 5일 ([age(1942-06-05)]세)
스페인령 기니 아코아칸
신체 175cm, 76kg
학력 Grupo Escolar Cardenal Cisneros
Centro La Salle de Bata ( 졸업[1]) (-1959년)
사라고사 일반육군사관학교 ( 학사) (-1965년)
UNED ( 법학 / 석사)
배우자 아내 콘스탄시아 망게
슬하 2남[2]
형제자매 남동생 아르멩골 온두 응게마(1970.2.3~)
약력 아프리카 연합 위원장 (2011년 – 2012년)
적도기니 제2대 대통령
재임기간 1979년 8월 3일[3] ~ 현재 ([age(1979-08-03)]년)
정당 적도 기니 민주당

1. 개요2. 이름3. 생애
3.1. 집권 전3.2. 쿠데타로 집권하다3.3. 집권 후
4. 독재 행각
4.1. 기록적인 장기집권4.2. 인권 탄압4.3. 2010년 망명자 납치 및 사법살인 사건4.4. 2017년 쿠데타 미수(?) 사건과 이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4.5. 식인 의혹4.6. 우상화4.7. 세습 준비 의혹
5. 부정부패
5.1. 사치 행각5.2. 유네스코와의 유착
6. 기타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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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젊었을 적의 오비앙 응게마.webp
1982년, 40세일때의 모습[4]
"국제김정일상 수상기준은 이렇게 정해야 사실과 맞게 제대로 되는 겁니다. '국제김정일상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가장 포악하게, 가장 부패하게 통치한 독재자에게 수여한다'고 말입니다."
주성하, 2013년 오비앙이 북한으로부터 국제김정일상을 수여받자 남긴 평가[5]

제2대 적도 기니 대통령이자 독재자.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였던 삼촌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다가 삼촌을 배신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삼촌을 처형하며 권력을 잡았고, 45년간 현역 대통령으로 집권하며 세계의 현직 독재자 중 가장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는 인물이다.[6]로 꼽히는 데다가 자국민 1만 명 이상을 살해하였다. 특히 국가에 매장된 석유로 막대한 수익을 얻으면서도 그 부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배분하지 않아 적도 기니의 빈부격차를 극단화하는 등 만행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잔혹하고 부패한 독재자 중 하나로 꼽힌다.

2. 이름

그의 이름을 오비앙 응게마라고 부르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오비앙의 종족인 팡족들의 작명법은 "이름 + 성씨 + 부계 성씨 + 모계 성씨"이며, 성씨는 대대손손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정하는 것이다. 가령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라는 이름도 테오도로(이름) + 오비앙(성씨) + 응게마(부계 성씨) + 음바소고(모계 성씨)로 구성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보통 테오도로 오비앙이라고 불리며, 공적으로는 오비앙이라고 불리지 절대로 "응게마"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의 아들인 테오도로 응게마 오비앙 망게도 같은 작명법으로 지어진 이름이라서, 아버지 오비앙으로부터 "오비앙"이라는 부계 성씨를, 어머니 망게로부터 "망게"라는 모계 성씨를 물려 받았으며, 부모는 아들에게 "응게마"라는 성씨를 정해 주었다.

3. 생애

3.1. 집권 전

1942년 6월 5일에 스페인령 기니의 아코아칸 마을 인근의 몽고모에서 가봉계 혈통의 10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테오도로 오비앙의 가족은 인두세를 피하기 위해 가봉으로 이주했으며,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는 재혼했다. 오비앙은 1958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같은 해에 적도 기니의 바타에서 노동 행정 학사 학위를 딴 후 스페인 사라고사에 있는 사관학교에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재학한 후[7] 1965년에 고국으로 돌아오고는 적도 기니 영토 수비대[8] 중위로 복무하면서도 스페인 국립 원격 교육 대학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따기도 했다.

오비앙은 1968년에 적도 기니가 독립하고 삼촌인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에 콘스탄시아 망게(Constancia Mangue, 1951~)[9]와 결혼했다.[10]

이후 오비앙은 '아프리카의 폴 포트'로까지 불릴 정도로 극악무도한 독재자였던 삼촌의 집권 기간 동안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는데, 1969년 11월 20일에 적도 기니 방위군 중위가 된 것을 시작으로 동년 12월부터는 수도인 말라보 지역의 모든 방위군을 총괄하게 되었으며, 1970년에는 국방부의 기획 및 공급 총책임자로 임명된 데다가 1971년에 쿠데타 시도를 발견한 '애국심'을 인정받아 대위로 진급했고, 1975년에는 대통령령으로 주 방위군 사령관에 진급했으며, 1976년에는 국방부 사무총장, 1979년에는 국방부 차관이자 중령에 올랐다. 그 외에도 오비앙은 비오코 주지사와[11] 방위군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76년까지는[12] 말라보에 있는 블랙 비치(Black Beach) 교도소의 소장을 지내기도 했다. 마시아스 응게마가 1974년부터 말라보를 떠나 실질적인 고향인 몽고모에 사실상 안착하게 되자 오비앙은 사실상 수도가 위치한 비오코 섬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거나 다를 바 없었다.[13]

블랙 비치 교도소 소장을 역임했을 적에 오비앙은 비록 직접적으로 수감자에 대한 고문과 처형에 가담했다는 증언은 없지만, 교도소의 어둡고 좁은 구석인 '사무실'에서 자정마다 개인적으로 심문과 수감자에 대한 약식 재판을 주관하며 수감자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은 물론이고, 블랙 비치 교도소에서 자행되던 수감자들에 대한 가혹행위와 처형은 오비앙의 명령에 전적으로 의존했고, 심지어는 가혹행위를 개인적으로 감독했다. 이 때문에 당시 응게마와 오비앙의 관계는 ' 히틀러 힘러의 관계와도 같았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였으며, 마시아스 응게마의 만행들과 블랙 비치 교도소의 참혹한 상황까지 고려하면 오비앙은 루돌프 회스, 깡 겍 이우[14]와 다를 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한 인물인 셈이었다.

그 외에도 오비앙은 1973년에는 반마시아스 운동과 관련된 문서를 제출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UN 개발 프로그램의 마르셀 루이스(Marceau Louis)를 체포하고 추방했으며, 1976년 1월 8일에는 나이지리아 영사관에 대한 공격을 직접 명령하여 11명의 사망자를 냈다.

3.2. 쿠데타로 집권하다

1979년 6월 중순에 국가보안부 소속 장교 6명이 수개월째 입금 체납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자 마시아스 응게마는 급료를 요구한 장교들을 모두 총살시켰고, 여기서 더 나아가 그들의 형제와 부모를 처형하라는 지시도 내려 이 한 사건으로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 중에는 그의 막내동생도 있었기 때문에 오비앙은 삼촌에 대한 충성심을 접고 1979년 8월 3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삼촌을 몰아낸 후 자신이 마시아스 응게마와 아무 관련도 없었다는 듯 삼촌의 동상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모든 정치범들과 망명자들을 사면하고는 8월 18일에 최고군사위원회 위원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그러고는 삼촌을 특별군사재판에 회부하였는데, 이때 테오도로 오비앙은 마약 중독에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던 삼촌에게 '심판에 가기 전에 정신과 센터를 거쳐야 한다.'라고 말했고, 9월 29일에 사형 판결 6시간 만에 다른 부하 5명과 함께 총살시키고는 10월 18일에 최고군사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취임한다.

참고로 테오도로 오비앙은 삼촌의 체포 후 삼촌인 마시아스 응게마를 방문하고는 삼촌을 재판에 송환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사실 이는 혈연의 정 때문이 아니라 삼촌이 본인을 재판에 소환하면 자신이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비앙은 삼촌을 "내가 이제 대통령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라는 말로 위협했으며, 물론 삼촌과의 마지막 약속도 전혀 지키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사실 하필이면 오비앙이 쿠데타를 계획한 것은 오비앙이 마시아스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타인이 마시아스를 축출시키면 오비앙도 군대나 대중에게 린칭을 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15] 이후 오비앙은 8월 3일의 쿠데타를 '자유 쿠데타'로 기념하기에 이른다.

3.3. 집권 후

푸틴도 이 사람 비하면 약과…'45년 집권' 세계 최장기 독재자

오비앙은 '새 출발'을 선언하며 정치범과 망명한 사람들을 사면하고 강제 노동 체제를 없애는 등 유화책을 펼치는 듯했다. 1981년 1월 31일에 대령으로 진급한 오비앙은 1982년에 헌법을 개정하고는 동년 8월 15일에 헌법 승인에 대한 국민투표가 95.38%의 찬성률을 기록하고는 7년 임기의 대통령 재임에도 국민들이 찬성표를 던졌고, 1987년 8월에 적도기니 민주당(PDGE)을 세운 후에 나온 1989년에도 결과는 99%의 찬성표가 나왔다. 참고로 PDGE 창설 초기의 적도 기니는 합법 정당이 PDGE 1개밖에 없는 일당제 국가였다.

오비앙은 시간이 지날수록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마시아스 응게마 정권의 핵심이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은폐한 것은 물론[16] 1981년, 1983년 5월, 1983년 11월, 1986년에 4차례나 정적 탄압을 위해 쿠데타 시도를 조작했으며, 이렇게 친위 쿠데타를 시도할 때마다 정적들을 군사재판에 회부된 후 주범으로 간주된 사람 한두명 가량을 본보기 격으로 없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법살인했으며, 1990년 12월에는 야당의 도입을 촉구하는 활동가 30명을 수감하고는 고문으로 6명의 수감자를 죽게 했으나 이 악행이 국제적인 비난을 받자 굴복하고는 1991년 11월에 개헌 여부를 찬성하는 국민투표가 98.4%의 찬성률로 받아들여진 후 1992년 1월에 새 헌법이 도입되어 적도 기니에서는 야당 설립이 허용되고 집회·시위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도입되게 된다.

물론 오비앙은 이 헌법에서 대통령 임기 햇수를 7년으로 정하고 임기 횟수의 제한을 아예 없애버린 데다가 국가원수에 대한 탄핵을 대놓고 헌법으로 금지시키고는 1996년(97.8%)과 2002년(97.1%), 2009년(95.4%), 2016년(93.5%), 2022년(97.1%)에 매 투표마다 항상 93%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를 받으며 5연승으로 당선에 성공했다. 참고로 2002년 선거에서는 오비앙의 득표율이 103%인 선거구도 있었다고 하며, 2009년과 2022년 대선 당시에는 오비앙 편을 들어주는 미국마저 부정선거가 의심된다는 논평을 냈다.

2000년대에는 2002년, 2004년, 2017년[17]에 있던 세 차례의 쿠데타 시도로 정권이 위협을 받기도 했는데, 특히 2002년 3월에는 200여명(140명이 넘는 야당 의원들과 사제 포함)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된 후 이들 중 의원 68명이 징역 20년형 이상을 선고받기도 했으며,[18] 2004년 3월 7일에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비행기 1대가 역류되었는데, 이는 마거릿 대처 영국 전 총리의 아들인 마크 대처가 지휘하는 영국인 용병들이 망명한 유명 야당 정치인인 세베로 모토 은사[19]를 대통령에 앉히려는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후자의 사건으로 15명이 구금되었다.

2006년에는 "야당이 정부의 행동을 비판할 권리가 있나?"고 말한 적도 있다. # 그럼 지가 처음부터 만들지를 말든가

2011년에는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해 이론상 2030년까지 집권할 수 있도록 했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90세까지 집권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도 그가 집권 44주년이 되는 2023년 정도 돼야 권좌에서 내려올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오비앙은 2006년부터 전립선암 합병증으로 몸무게가 50kg 미만으로 빠지고 종종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전해져서 어찌 될지는 지켜봐야 한다.[20] 다만 오비앙은 2007년에 바타에서 로버트 영 펠튼(Robert Young Pelton)과 인터뷰를 했을 때 자신은 약간 당뇨병을 앓는 것 외에는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고, 전립선암에 걸렸다는 시점으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2024년 현재까지도 특별한 건강 이상 의혹은 보도되지 않고 있다.

2011년 1월 31일부터 2012년 1월 29일까지 아프리카 연합의 의장을 맡았다.

2020년 8월 16일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경제가 악화되자 내각을 교체하였다. #

2022년 9월 19일에 적도 기니의 국영 TV는 오비앙 대통령이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고 보도했다. 기사[21]

2022년 11월 20일에 열린 대통령 선거의 최종 개표 결과에서 오비앙은 20년 전 선거와 비슷한 97.1%라는 지지율이 나오며 또다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로써 오비앙은 신변과 건강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가정할 시 88세가 되는 2030년까지 장장 51년을 권좌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비군주 인물 중 피델 카스트로 다음으로 오래 집권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1차 개표에서는 99.7%라는 득표율이 나왔는데,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횡행하고 있다.[22] 이와 함께 열린 총선에서도 여당이 상원 70석,[23] 하원 100석을 전부 전유함으로써 적도 기니는 1993년 이후 29년 만에 사실상의 일당제 국가로 변했다. 특히 야당제 허용 이후로는 최초로 PDGE가 전 의석을 독점한 셈이다.

2023년 1월 10일에 스페인 당국은 스페인에 망명한 반오비앙 운동가 2명에 대한 납치 및 고문 혐의로 오비앙의 아들인 해외 정보부 장관, 내무부 장관, 대통령 경호국장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 공개되었다. 기사

2023년 2월 2일에는 다시 한 번 개각을 했는데,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던 마누엘라 로카 보테이(Manuela Roca Botey)를 적도 기니 최초의 여성 총리로 앉혔다. #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다는 의혹이 있는데, 실제로 2024년 2월 미국 특수작전부대가 적도 기니에 구호물자를 전달한 바가 있다. #

2024년 8월 3일, 집권 45주년을 맞이했다.

4. 독재 행각


- 적도 기니 민주화 운동가, 투투 알리칸테(Tutu Alicante)의 강연, '오비앙의 왕국에서(In the Kingdom of Obiang)'

4.1. 기록적인 장기집권

오비앙은 1979년에 집권했음에도 집권 45년 차인 2024년 현재까지도 대통령직을 내려놓지 않고 있는데, 이 때문에 오비앙은 세계사 속 비군주 통치자 중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도 유명하다.

40년 이상 집권한 독재자는 피델 카스트로, 장제스, 김일성,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무아마르 카다피, 오마르 봉고, 엔베르 호자, 폴 비야, 드니 사수 응게소[24] 9명밖에 없다. 위 9명 중 오비앙보다 오래 집권한 독재자는 카스트로, 장제스, 김일성 등 3명밖에 없다.[25] 만약 오비앙이 2025년까지 집권한다면 김일성의 기록도 넘게 된다. 게다가 상술한 것처럼 오비앙은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했으니 그 전에 사망하지만 않는다면 장제스와 김일성도 능가하고 피델 카스트로 다음으로 반세기 이상 집권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심지어 그가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집권했는지를 더욱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박정희 사망 약 2개월 전에 집권한 사람이 2024년 기준으로 윤석열 집권기인 현재까지 계속 현직 대통령으로 집권하는 셈이다. 1979년부터 45년 동안 대한민국 대통령이 약 11명이나 바뀌었음을 생각하면 이 작자가 얼마나 장기집권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집권기에 태어난 인물 중에도 벌써 국가수반이 된 리시 수낙(1980년생) 영국 총리나 나이브 부켈레(1981년생) 엘살바도르 대통령, 김정은(1984년생) 북한 국무위원장 같은 인물도 있다.

4.2. 인권 탄압

테오도로 오비앙은 다른 독재자도 아닌 폴 포트와 비교될 정도로 극악무도한 독재자였던 삼촌을 몰아낸 인물이었기에 집권 직후에 한해서는 적도 기니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도입할 사람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26], 정작 집권하고 보니까 오비앙도 삼촌 마시아스 응게마보다 나을 바가 없는 잔혹한 인권 탄압을 자행하는 극악무도한 독재자였다. 실제로 2008년에 미국의 언론인 피터 마스(Peter Maass, 1960~)는 오비앙이 ' 로버트 무가베보다 더 악랄한 독재자다'라고 혹평했으며[27], 2024년 기준으로도 적도 기니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총합 5점(정치적 권리 0점 + 시민 자유 5점)을 기록해 195개국 중 190위를 기록했다.[28] 자세한 것은 적도 기니 문서의 '정치' 문단을 참조할 것.

4.3. 2010년 망명자 납치 및 사법살인 사건

2010년에는 슬란스키 재판 인혁당 재건위 사건도 능가하는 희대의 사법살인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적도 기니 보안군은 2010년 1월에 베냉에서 수 년 동안 정치적 망명 생활을 하던 20년 전 퇴역한 전직 장교 3명과 현직 공무원 1명을 비밀리에 납치해[29] 블랙 비치 수용소에다가 비밀리에 구금, 고문했는데, 적도 기니 당국은 고문으로 얻은 자백을 바탕으로 이 4명에게 '국가 원수 및 정부 대표에 대한 공격, 반역 및 테러', 쉽게 말해 2009년 2월 17일에 있던 적도 기니 대통령궁 습격을 조율하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30]를 뒤집어씌웠다.

적도 기니 당국은 이렇게 날조한 혐의를 가지고 동년 8월 14~16일에 이들 4명을 말라보의 군사법원에서 '즉결적인' 약식 재판을 거치게 한 후[31] 8월 21일에 피고들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형을 사형으로 확정시키고는 이 4명을 형 확정 1시간 만에 모조리 총살형시켰다.[32] 처형 속도가 즉결처형에 준하는 수준으로 빨랐던 나머지 사형 선고를 받은 피고 중 1명이 마지막이라도 가족 면회를 해달라고 해서 군 관계자가 그의 아들 중 1명과 아내를 데리고 왔지만, 군 관계자가 유가족을 데리고 오는 사이에 처형이 끝나서 블랙 비치 수용소에 온 유가족들은 너무 늦었다는 통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불합리한 조치에 국제앰네스티[33] 등의 인권단체들과 유엔,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거세게 항의했으나, 적도 기니 정부는 오히려 '4명에 대한 신속한 재판과 처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고, 유엔 주재 적도기니 대표인 아나톨리오 은동 음바(Anatolio Ndong Mba)는 "처형된 사람들은 정부 전복 계획을 가지고 스스로 적도 기니로 돌아갔다" "그들은 체포되어 심판을 받았다" "적도 기니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적도 기니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라고 말했으며, 오비앙도 서면 성명에서 "이 4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신속히 처형된 것은 나와 나의 가족, 정부에 대한 임박한 위험으로 인해서이다" "적도 기니가 현재 진행 중인 개혁을 이행하기 위해 여전히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국과 다른 기부자들이 '국가 안보'와 대통령 개인의 안보에 대한 위험의 심각성을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나라 망신을 당한 적도 기니는 이 사건 이후로 3년여간 사형 집행을 하지 않다가 2014년 1월 31일에 살인 용의자 4명을 처형한 것을 마지막으로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았으며, 2019년 4월 14일에 오비앙은 사형제를 곧 폐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상기한 것처럼 2022년 9월 19일, 결국 적도 기니는 아예 사형제를 폐지하기에 이른다.[34]

4.4. 2017년 쿠데타 미수(?) 사건과 이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

2017년 11월 12일에 있던 총선은 온갖 부정선거 의혹 속에서 치러졌고,[35] 선거 참여율이 84%였던 이 선거의 결과 PDGE는 의석 170개(상원 70개+하원 100개) 중 하원 의석 1개를 뺀 모든 의석을 싹슬이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 결과에 오비앙은 '시민들이 민주주의 에세이를 육성하고 있으며, 야당은 폭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기를 원한다'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한 반면, 의석을 차지한(하원 1개) 유일한 야당인 '혁신을 위한 시민(CI)[36]'은 선거 결과에 대해 항소할 것이며, 선거를 무효처리하고 재선거를 치르라고 요구했다. 물론 오비앙은 12월에 CI의 간부 전체에 대한 수색 및 체포 영장을 발부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12월 27일에 적도 기니 당국은 CI와 반정부 정당들의 연합 단체, 차드의 장군이 결탁하여 오비앙 대통령 일가를 암살하기 위해 외국인 용병들을 고용했고, 이를 카메룬 인근 변경에서 준비하고 12월 24일에 시행하려고 했던 쿠데타 시도가 발각되어 쿠데타를 시도하려 한 30명 정도의 무장한 사람들을 체포했다'라고 발표했다.[37] 이 소식이 알려지자 오비앙은 정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나섰다.

해외에서까지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쿠데타에 가담한 것으로 지목되어 연행된 후[38] 재판 없이 구금되어 무자비한 구타와 '마시아스 독재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잔혹한 고문을 당한 데다가 밀집된 방에 구금되어 변호사와 가족과의 면회, 물과 음식 제공, 화장실 이용, 치료가 금지되었으며, 한 환자는 연행된 후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 고문을 당했고, 임산부까지 연행되어 고문후유증으로 유산하거나 경찰서에서 강제로 낙태 수술을 당했으며, 심지어 한 수감자는 2018년 1월 13일에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하기도 했다.

2018년 2월에 진행된 재판에서는 146명이 회부된 후 36명에게 징역 26년형이 선고되고, 이와 동시에 CI의 불법화도 선고되었다. 이에 대해 국내외에서 항의가 빗발치고 7월 3일에 연행된 사람 중 1명이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하자 바로 다음날에 오비앙은 모든 정치범에 대한 사면을 선포했고, 실제로 독립 50주년 전야인 10월 11일에 CI와 관련된 수감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다만 CI와 관련 없는 다른 수감자 40여 명[39]은 여전히 감옥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고, 2019년 3월 22일부터 5월 24일까지 두 명의 군 검사와 두 명의 군 치안 판사가 투입된 군사재판에서 180명 이상의 피고들이 재판을 받았으며, 재판 결과 130명(이들 중 55명이 궐석재판 상태)의 피고인에게 무자비하다 못해 황당하기 그지없는 형량이 선고되었다.

스페인에 망명하며 반오비앙 운동을 하던 3명은 쿠데타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96년형을 선고받았고,[40] 피고인 중 25명이 징역 70년형 이상을 선고받았으며, 세베로 모토는 징역 59년형을 선고받았고, 유럽에 있는 야당 의원들도 형을 선고받았다. 뿐만 아니라 차드, 카메룬,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국적을 가진 외국인 24명도 납치된 후 '쿠데타를 수행하기 위해 탄약을 들고 적도 기니로 국경을 넘으려 한 용병'으로 몰려 형을 선고받았다.

심지어는 단지 토고에서 일자리를 찾으려 했다가 갑자기 납치되어 적도 기니로 강제로 이송된 후 쿠데타 미수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은 사람까지 있었으며, 프랑스인 5명[41]도 형을 선고받은 데다가 적도 기니 출신 이탈리아인 엔지니어마저 쿠데타 가담 혐의로 징역 58년형이 선고되어 유럽 내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다만 이렇게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 중 최종적으로 21명은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됐으며[42] 최저 형량을 적용받은 피고는 겨우(?)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도 굉장히 불공정했는데, 실제로 이 사건의 재판 과정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완전히 판박이 수준이었다. 피고인들에게는 재판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형이 확정된 상황이었고, 고문을 통한 자백 외에는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았으며, 재판관들은 변호인이 법정에서 고문 혐의를 제기하는 것을 금지했고, 의뢰인을 변호하지 못하도록 가혹한 제재를 가한 데다가 피고인을 심문하는 동안 변호인단이 매우 제한된 방식으로 몇 분 동안만 발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심지어는 변호사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검찰 측의 증인에 대한 반대 심문을 하는 것조차 금지됐으며, 재판부는 피고들에게 검찰이 구형한 형량[43]보다도 더 가혹한 형량을 선고했다.

설령 이것이 진짜 쿠데타 미수 사건이라 치더라도 사건이 일어났다는 시기가 뜬금없는 데다가 이 사건에 대한 대한 보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자비했고, 근거라고 할 것도 고문을 통한 자백밖에 없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 쿠데타가 사실은 오비앙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가 아니냐는 주장까지 할 정도다. 여하튼 조작 여부와는 상관없이 오비앙은 집권 초의 경험을 더욱 강화했다고 볼 수 있는 이 사건으로 야당 세력 제압에 완벽하게 성공했고, 2022년 총선에서 사실상의 일당제 국가로 복귀하는 기틀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오비앙은 뭔 생각에서인지 2022년 CI 본부를 공격해 가브리엘 은세 오비앙(Gabriel Nsé Obiang) 당 대표를 포함해 무려 275명을 체포했고,[44] 2023년 6월,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징역 29년을 선고받은 오비앙을 포함해 CI 회원 수십 명에게 9년~29년[45]의 이상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4.5. 식인 의혹

심지어 오비앙은 정적들의 인육을 먹었다는 의혹까지 있다.[46] 상술한 쿠데타가 실패한 지 3일이 지난 2004년 3월 10일 세베로 모토는 스페인 라디오 방송국과 한 인터뷰에서 "그는 방금 경찰국장을 삼켰습니다. 나는 이 사람이 고환과 뇌 없이 묻혔기 때문에 삼켜졌다고 말합니다. 오비앙은 제 고환을 먹기 위해 제가 적도 기니에 돌아오는 것을 원합니다."고 말하며 오비앙이 자신의 힘과 정력을 강화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정치적 경쟁자를 체계적으로 잡아먹었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 인터뷰에서 모토는 자신이 언급한 오비앙의 식인설이 은유가 아니란 것을 분명히 했다. 의미심장하게도(?) 적도 기니 정부는 이 주장을 부인하는 성명을 내놓지 않았다.[47]

다만 이 증언을 뒷받침할만한 추가적인 증언과 신빙성 있는 자료는 나오지 않는데, 신뢰 여부와 상관없이 21세기의 독재자가 인육을 먹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면 오비앙의 폭정이 얼마나 악명이 높은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적도 기니의 망명자들은 오비앙의 식인 루머가 정적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일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면 적도 기니 정부가 오비앙의 식인 의혹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또한 오비앙이 삼촌을 처형시킨 후 적도 기니 주민들 사이에서는 "조카가 삼촌을 처형한 후 '도살'하고 먹었다"는 끔찍한 루머까지 돌았다. 그만큼 오비앙에 대한 원성도 컸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는 셈이긴 하지만.

4.6. 우상화

오비앙은 삼촌을 따라 자신의 우상화에도 열중했다. 2003년 7월에 적도 기니의 국영 라디오로 송출된, 대통령 보좌관이 주관하는 'Bidze-Nduan(Bury the fire)'에서는 오비앙이 '인간과 사물에 대한 모든 권세를 가진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같다'고 선언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는 응게마 대통령과 영구적으로 접촉하시고 그에게 힘을 주시고 있으며, 따라서 응게마 대통령께서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으면서 지옥에 가지 않고도 살인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다만 오비앙은 1993년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발언을 직접 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오비앙은 공개 연설을 할 때 연설의 마지막을 국가 전체가 아닌 자신의 쾌유를 위한 말로 종결했고, 마시아스에 대한 오비앙의 쿠데타를 기념한 거리들이 세워졌으며, 오비앙의 얼굴이 새겨진 옷들이 판매되었다. 오비앙에게 온갖 호칭들이 새로 붙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참고로 오비앙은 자신을 'El Jefe(두목)'라 칭했으며, 그의 호칭 중에는 '위대한 섬 비오코와 안노본, 리오 무니의 선지자'도 있다.

적도 기니 민주당 공식 사이트에서도 오비앙은 '아프리카 대륙의 지도자' '적도 기니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정한 혁명을 추진한 철학자의 돌'로 불리며 '적도 기니를 민주화한 지도자'[48]로 묘사되는 것은 물론이고 적도 기니의 석유 발견도 다 오비앙의 공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오비앙이 누구보다 마시아스 응게마에게 충성을 바치며 누구보다 잔혹하게 국민들을 탄압했다는 것은 전혀 언급되지도 않는다. #[49]

4.7. 세습 준비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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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로 응게마 오비앙 망게(Teodoro Nguema Obiang Mangue, 1968.6.25~)

2016년부터 적도 기니 부통령을 역임중인 아들 응게마 오비앙 망게에게 권좌를 물려주려 한다는 의심이 솔솔 나왔다.

오비앙 망게는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생활로도 악명이 높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가 밝힌 바에 따르면 걸프스트림 제트기(3800만 달러), 미국 캘리포니아주 말리부의 호화 저택(3500만 달러), 드가·르누아르·마티스 등의 회화작품(3400만 달러), 롤스로이스 자동차 5대(250만 달러). 여기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피아제 시계 4개(400만 달러), 17세기 프랑스 고가구(340만 달러), 마이클 잭슨이 '배드' 앨범 투어 때 착용한 흰색 크리스탈 장갑(27만 5천 달러)이 알려진 재산 중의 일부다. 기사.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부자만 산다는 말리부 해안가에 현금 3천만 달러(약 330억 원)를 주고 산 저택에 사는데, 미국의 유명한 영화배우인 멜 깁슨과 팝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이웃이다. 또한 벌목 허가를 받으려는 해외 기업에서 받는 혁명세 수입이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이러한 금액들을 사실상 그가 갈취한다. 수출되는 목재당 27달러씩이 오비앙에게 바쳐지는 세금 명목으로 부과되었는데, 만약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면 적도 기니에서 쫓겨났다. 또한 그가 미국에 유령회사를 만들어 돈 세탁을 해 적도 기니에 들여온 돈이 2010년 한 해에만 1억 달러(약 1100억 원)였다. 또한 그는 미국의 유명 팝가수 이브(Eve)를 비롯해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 표지 모델 같은 숱한 여성들과 세계 유명 휴양지에서 데이트를 즐긴다고 전해지며[50]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인 폴 앨런에게서 길이 100m짜리 요트를 하루 70만 달러에 빌려서 그 요트를 타며 휴가를 즐기기도 했다. 또한 그와 데이트를 한 여성들은 구찌, 베르사체 등의 명품들을 명품 매장에서 한 번에 8만 달러 어치를 사기도 했다.

이러한 부패 혐의 때문에 프랑스에서 재판을 받았다. 기사

만약 오비앙이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는 것이 성공한다면 적도 기니는 사실상의 3대 세습에 성공하는 것이 되는데, 다만 응게마 가문의 권력 세습은 북한의 ' 백두혈통'보다는 니카라과 소모사 가문에 가까운 편이다.[51]

5. 부정부패

적도 기니 천연가스 석유가 풍부한 자원 부국으로,[52] 넘쳐나는 석유, 천연가스, 목재 등을 팔아 한때에는 (통계에 따라서는) 1인당 GDP가 한국보다 높게 집계된 적도 있었다. [53] 비록 적도 기니의 1인당 GDP는 (이하 세계은행의 통계 기준으로) 2008년에 1만 9850달러로 정점을 맞이하고 2009년에 1만 4399달러로 크게 폭락한 후 2013년부터 계속(2017~2018년, 2021년은 제외) 꾸준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여 2021년에는 7506달러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적도 기니의 1인당 GDP는 2021년 기준으로도 세이셸(1만 4653달러)와 모리셔스(9106달러), 가봉(8635달러)과 함께 아프리카 내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오비앙은 이렇게 나라에 부를 가져다준 자국의 석유를 '하늘에서 온 만나'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오비앙 본인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10인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1인당 GDP가 약 1만 8659달러였던 2011년에도 적도 기니는 아동의 26%가 영양실조에 걸린 데다가 빈곤선 밑에서 사는 국민들이 44%였고, 2020년 기준으로도 5세 미만 영유아 사망률이 193개국 183위인 1000명당 58.28명에 이르며 평균수명은 194개국 중 185위인 59,8세(여성 61.1세 / 남성 58.8세)로 나타났고, 2021년 기준으로 인간개발지수는 191개국 중 145위로 나타났으며, 2022년 기준으로도 인터넷 사용률은 24.5%에 불과하다.[54] 또한 적도 기니의 지니 계수는 비공식적으로는 0.650로 집계된 적도 있으며 2009년에는 소수의 지배층들이 국부의 98%를 차지했다는 말까지 전해지고 있는데[55], 이렇게 빈부격차가 심한 이유는 오비앙 일족의 부정부패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비앙 일가와 고위 관리들은 적도 기니의 부의 90% 이상을 통제하고 국가 부동산의 50%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적도 기니의 부정부패는 2022년자 부패인식지수에서 100점 만점에 17점을 기록해 부룬디, 아이티, 북한, 리비아와 함께 180개국 중 공동 171위를 기록되었을 정도로 심각하다.[56]. 이러한 점에 대해, BBC 기사에서 인용된 포르투갈 대학교의 아나 루시아 사 교수는 오비앙이 '빈곤을 정치적 무기로 이용한다'라고 평하였다. 기사 번역본

오비앙은 삼촌의 집권기부터 마약 밀매에 가담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1997년에는 전직 정보부 장관과 오비앙의 친척이 마약 밀매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그가 집권하면서 적도 기니는 서아프리카 마약 밀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

2003년에 오비앙은 '공무원들이 부패한 관행에 가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국고를 개인적으로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고 시민들에게 말했다. 그 후 오비앙은 워싱턴 D.C.에 있는 피노체트의 자금 은닉처이자, 9.11 테러범들의 송금처로 이용되었던 뉴욕의 릭스 뱅크에 있는 자신과 가족이 관리하는 60개 이상의 계좌에 5억~10억 달러 정도를 예치했다. 이 사건은 미국 연방 법원이 릭스 뱅크에 벌금 1600만 달러를 부과하는 조치를 내린 것, 올브리튼(Albritton) 일가의 이사회 사임, 그리고 PNC로 인수됨을 야기하였다.

2006년에 포브스는 오비앙과 그의 친척들이 가지고 있는 사업체의 가치를 환산하면 약 80억 달러로 추산된다고 보고하였다. 동년 적도 기니의 GDP는 약 101억 달러였다. 참고자료

거기에 오비앙은 안노본 섬에 화학 폐기물을 매립하도록 허용한 대가로 매년 약 2억 달러를 수수받았다고 하며, 물론 이렇게 받는 돈은 섬에 재투자되지 않아 2009년 기준으로도 안노본 섬[57]에는 자동차나 도로, 전기, 수도, 텔레비전, 공장도 없었을 정도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데다가, 의료 서비스도 제대로 될 리가 없으니 동시기 기준으로 안노본 섬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 중 무려 40%가 저체중, 빈혈, 위장병 등의 병을 앓고 있었다.

2011년에 프랑스의 비정부 기구가 오비앙과 측근들의 부정부패에 대해 다룬 보고서를 작성하자 오비앙은 이 행동이 자신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프랑스 법원에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물론 프랑스 법원은 요구를 기각했다.

2017년에는 아들과 함께 1억 1000만 유로를 횡령한 혐의로 프랑스 검찰에 기소됐다. 기사

게다가 적도 기니의 석유 매장량은 2012년부터 감소하는 추새라 새로운 매장량이 발견되지 않으면 2035년에 완전히 고갈될 가능성이 높다. 2019년 기준으로도 석유 혼자만이 적도 기니의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8.5%고, 석유가스까지 합하면 무려 89%나 되는 만큼 석유가 고갈되면 예전과 같은 빈곤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58] IMF 통계 기준 적도 기니의 2024년 1인당 GDP는 6,500$로 세계 평균의 절반보다도 낮아지면서 이제는 중진국 체면치레조차 불가능해졌다.

5.1. 사치 행각

응게마 일가는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적도 기니의 수도인 말라보에 있는 대통령 관저 외에도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는 1999년 미국 메릴랜드 주에 현금 260만 달러를 주고 저택을 마련한 데 이어 이듬해 또 다른 메릴랜드 주택을 115만 달러에 샀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 여름 궁전을 갖고 있으며, 미국 매릴랜드에도 두 채의 별장을 갖고 있다. 특히 그는 전용기 6대로 이들 거처를 호화스럽게 여행한다. 또한 샹젤리제 인근의 호텔 플라자-아테네에서 하룻밤에 2천 파운드(343만원) 가격의 스위트룸을 즐겨 찾는 것으로 전해진다. 기사. AP통신 등 외신들은 "적도 기니의 연안에 수십억 달러 상당의 원유가 매장돼 있다", "독재와 인권 탄압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그가 국제사회에서 비난을 덜 받고 있는 것은 원유 공급을 둘러싼 서방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원유를 이용해서 입을 막고 있으며,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적도 기니의 대통령인 그의 재산은 10억 달러(약 1조 1천억 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테오도로 오비앙의 큰 아들인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망게는 적도 기니의 부통령 겸 안보 담당 장관이며, 차남 가브리엘 음바가는 석유장관직을, 처남은 국영 석유 회사의 수장을 맡고 있는 등 사실상 적도 기니의 중요 요직을 오비앙 가문이 다 차지하였다. 이 때문에 서방 외교관들은 오비앙 가문이 적도 기니의 모든 것을 주무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물론 응게마의 아들도 그를 닮아서 여러 대의 벤틀리와 람보르기니와 같은 고급스러운 승용차들을 잔뜩 가지고 있으며,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2016년에는 스위스에서 테오도린 오비앙 소유의 고급차 11대를 그의 부패 혐의와 관련해 압류했다. 기사. 2019년에 경매로 나왔다. #

오비앙의 아들인 테오도린 오비앙은 마이클 잭슨의 크리스탈 장갑과 마이클 조던의 서명 농구공을 포함한 기념품을 사기 위해 300만 달러(34억 원)를 사용하는 등 총 7천만 달러(792억 원)를 사치하는 데 썼다. 그는 말리부 해변에 고급스럽게 지어진 3천만 달러짜리 저택과 3850만 달러짜리 전용 제트기를 소유하고 있으며, 람보르기니 베네노 로드스터[59]와 페라리 등 고급 명품차를 수십 대나 갖고 있다. 문제는 그가 맡은 농림장관의 월급이 고작 6800달러에 불과한데 대체 그 돈을 어떻게 모았느냐는 점이다. 기사.

한편 카니발 축제 팬인 오비앙은 부통령직을 맡고 있는 아들과 함께 리우데자네이루를 방문해 카니발 VIP석을 12만 레알(약 4500만 원)로 구입해 축제를 즐겼다고 하며,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대량의 고급 샴페인을 마시면서 돈을 썼다. 기사

5.2. 유네스코와의 유착

오비앙은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국고 300만 달러를 써가며 2008년에는 유네스코가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생명 과학 연구 활성화에 기여한 과학자들에게 상과 상금을 수여하는 유네스코-오비앙 생명과학상(UNESCO-Obiang International Prize for Life Sciences)을 제정했으나, 오비앙의 독재 행각 때문인지 상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더구나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 등의 노벨상 수상자 중심으로 이 상에 대한 국제적 항의가 빗발치자 2010년 10월에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유네스코 회원국들이 이 문제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상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이 상에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2010년 5월 6일에 '유엔의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다른 단체들은 (유네스코-오비앙 생명과학상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 유네스코의 접근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먼저 세계식량계획은 농업 생산성에 대한 로버트 무가베 상을 제정하기 위해 짐바브웨 대통령에게 자금을 요청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UN 난민 기구는 미얀마 군부로부터 수백만 달러를 짜내 탄 슈웨 상을 수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계보건기구는 분명히 이탈리아 총리를 유혹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성교육 메달에 약간의 현금을 제공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60].

그러나 2012년 2월 22일 정부의 유엔 대표단은 유네스코에 "지금부터 적도기니 정부가 상을 수여한다"는 서한을 보내며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고, 유네스코는 이 상의 이름을 '유네스코-적도 기니 국제 생명 과학 연구상(UNESCO-Equatorial Guinea International Prize for Research)'으로 바꾸고는 2012년 3월 9일에 투표를 열어 찬성 33명, 반대 18명, 기권 6명으로 최종 승인했으며, 2012년 7월 16일에 유네스코는 국제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집트, 남아공, 멕시코 출신 수상자 3명에게 '유네스코-적도 기니 국제상'을 수여하기에 이른다. 이후 이 상은 간헐적으로 수상식이 열리고 있으며, 2022년에도 제6회 수상식이 거행되었다.

6. 기타

  • 김일성과 친하게 지내고 축출 직전에 자식 3명을 만경대혁명학원에 유학을 보낸 삼촌처럼 북한과 어느 정도 인연이 있다. 실제로 북한은 2012년 12월 24일에 김정일의 군 최고사령관 추대 21주년을 기념하여 국제김정일상[61]을 만들고는 "정의, 개발, 평화 및 조화에 대한 공로"를 이유로 2013년에 이 상의 첫 수상자로 바로 테오도로 오비앙을 선정했는데, 동년 8월 7일에 평양에서 이 상을 수여받을 당시 오비앙은 적도 기니를 방문한 김기남 노동당 비서로부터 이 상을 받으면서 과거에 김일성을 면담한 것을 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62][63] 이후 국제김정일상은 2017년 2월 15일에 오가미 겐이치 주체사상국제 연구소 사무총장[64]이 수여받은 것 외에는 어떠한 수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은 적도 기니 의사당 건설을 지원해준 바가 있다.
  • 2010년 8월 11 ~ 14일에 방한한 적이 있으며 12일에는 이명박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고 이명박 대통령 앞에서 한국에 대해 "한국의 발전이 경이롭다. 스스로가 자신의 발전을 이룩한 전설의 나라 한국의 발전상을 따라 배우겠다."고 여러 차례 말하기도 했다. 2024년 6월 4~5일에도 한-아프리카 정상회담을 위해 14년 만에 방한해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과 양자회담을 하기도 했다. #
  • 적도 기니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연간 6만 달러의 돈을 들여 글로벌 마케팅 및 홍보 회사인 레이스포인트를 고용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로비스트 래니 데이비스[65]에게 연간 100만 달러를 지불하기도 했다. 실제로 오비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석유 이권 때문에 오비앙을 비호해준다고 자주 비판하고 있다.
  • 그는 사관학교에 재학할 시절, 마약을 복용하기도 했다. 다만 집권 후에 오비앙이 마약을 복용했다는 말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면 쿠데타로 축출된 후 도피할 때에도 마약이 든 가방을 가지고 갈 정도로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던 삼촌과 비교하면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거나 마약 중독 치료를 성공적으로 끝마쳤을 가능성이 높다.
  • 그는 여러 만평 등을 통해 풍자되었다. 국경 없는 기자회 조사 기준으로 180개국 중 141위를 기록할 정도로 언론의 자유를 제약함과 동시에 석유와 가스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있는 모습을 그린 만평 #, 사실상의 국왕이나 다름 없는 정도의 독재 정치를 하고 있음을 풍자하는 만평 #, 자신과 정부 각료들을 풍자하는 내용을 그린 만화가를 구속한 사건을 비판한 만평 #1 #2, 수없이 대통령에 재선출되는 형식 상의 투표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 이름 오비앙(Obiang)을 젊다는 뜻의 Young과 결합해 'OBIYOUNG'으로 표현하면서 마치 신진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듯이 허물을 벗고 탈피를 하는 오비앙의 모습을 그린 만평 # 등이 그 예시다.
  • 문화어식 표기법으로는 '오비앙 느게마 므바쏘고'다.
  • 오만 술탄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이 오비앙과 평행이론에 가까운 행적을 보여줬다. 둘 다 연배가 비슷하고,[66] 집권 이전 고국이 전근대 수준의 국가였다는 것, 쿠데타를 통해 가족을 몰아내고 집권했다는 점, 석유를 통해 가난했던 고국을 부자로 만들었다는 것, 생존 시점 기준으로 동시기 동지역의 지도자 중 최장 기간 집권 중인 인물이라는 점이 유사하다. 하지만 카부스는 오비앙과 정반대로 발굴한 석유들을 국가 발전에 탕진(?)하며 오만을 부국으로 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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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 아랍에미리트의 대통령은 아부다비의 아미르가 겸직하여 사실상 군주에 가깝다.
*** 이란의 국가원수는 라흐바르이며, 대통령은 정부수반이다.
**** 현직 장성급 장교들이 국회의원을 겸직하는 정당이라 사실상 미얀마군 소속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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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흐나깅 후렐수흐 민 아웅 흘라잉 (권한대행) 모하메드 샤하부딘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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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얀 라샤드 알알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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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 산마리노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 아닌 두 명의 집정관이다.
*** 오스트리아와 포르투갈은 헌법상 이원집정부제이나 사실상 의원내각제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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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나스 나우세다 (재선) 야코브 밀라토비치 (초선) 마이아 산두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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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전선(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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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암 스피테리 데보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6선) 데니스 베치로비치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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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다나 실랴노프스카다프코바 (초선) 에르신 타타르 (초선) 루멘 라데프 (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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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펠레그리니 (초선) 나타샤 피르츠 무사르 (초선) 바하근 하차투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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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라 토마스도티르 (초선) 마이클 D. 히긴스 (재선) 일함 알리예프 (5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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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람 베가이 (초선) 아슬란 브자니야 (초선) 알라르 카리스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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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트란스니스트리아 국기.svg 트란스니스트리아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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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딤 크라스노셀스키 (재선) 마르셀루 헤벨루 드 소자 (재선) 안제이 두다 (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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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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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민주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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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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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판 알리 (초선) 베르나르도 아레발로 다니엘 오르테가 (5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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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아비나데르 (재선) 실바니 버튼 (초선)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파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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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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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민주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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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밀레이 (초선) 에드가르 르블랑 피스 (과도위원회 의장) 다니엘 노보아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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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재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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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브 부켈레 (재선) 시오마라 카스트로 (초선) 루이스 라카예 포우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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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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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콜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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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보리치 (초선) 로드리고 차베스 로블레스 (초선) 구스타보 페트로
파일:트리니다드 토바고 국기.svg 트리니다드 토바고* 파일:파나마 국기.svg 파나마 파일:파라과이 국기.svg 파라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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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실현|
목표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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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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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캉갈루 (초선) 호세 라울 물리노 (초선) 산티아고 페냐
파일:페루 국기.svg 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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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나 볼루아르테 (초선)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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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
** 현재 군사정권이거나 혹은 사실상 해당 국가의 군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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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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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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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민당(감비아)|
국가인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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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아쿠포아도 (재선) 브리스 클로테르 올리기 응게마(권한대행) 아다마 배로 (재선)
파일:기니 국기.svg 기니** 파일:기니비사우 국기.svg 기니비사우 파일:나미비아 국기.svg 나미비아
[[기니군|
기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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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뎀 G15|
마뎀 G15
]]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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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디 둠부야 (권한대행) 우마로 시소코 엠발로 (초선) 난골로 음붐바 (초선)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나이지리아 파일:남수단 국기.svg 남수단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진보회의|
전진보회의
]]
[[수단 인민해방군|
수단 인민해방운동
]]
[[아프리카 국민회의|
아프리카 국민회의
]]
볼라 티누부 (초선)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초선) 시릴 라마포사 (3선)
파일:니제르 국기.svg 니제르**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 라이베리아 파일:르완다 국기.svg 르완다
[[니제르군|
니제르군
]]
[[통일당(라이베리아)|
통일당
]]
[[르완다 애국전선|
르완다 애국전선
]]
압두라하마네 치아니 (권한대행) 조셉 보아카이 (초선) 폴 카가메 (4선)
파일:리비아 국기.svg 리비아 파일:마다가스카르 국기.svg 마다가스카르 파일:말라위 국기.svg 말라위
[[무소속|
무소속
]]
[[단호한 말라가시 청년들|
단호한 말라가시 청년들
]]
[[말라위 의회당|
말라위 의회당
]]
모하메드 알 멘피 (대통령위원회 의장) 안드리 라조엘리나 (재선) 라자루스 차퀘라 (초선)
파일:말리 국기.svg 말리** 파일:모리셔스 국기.svg 모리셔스* 파일:모리타니 국기.svg 모리타니
[[말리군|
말리군
]]
[[투쟁 사회주의운동|
투쟁 사회주의운동
]]
[[공정당|
공정당
]]
아시미 고이타 (권한대행) 프리트비라즈싱 루푼 (초선) 모하메드 울드 가주아니 (초선)
파일:모잠비크 국기.svg 모잠비크 파일:베냉 국기.svg 베냉 파일:보츠와나 국기.svg 보츠와나
[[모잠비크 해방전선|
모잠비크 해방전선
]]
[[무소속|
무소속
]]
[[보츠와나 국민전선|
보츠와나 국민전선
]]
필리프 뉴시 (재선) 파트리스 탈롱 (재선) 두마 보코 (초선)
파일:부룬디 국기.svg 부룬디 파일:부르키나파소 국기.svg 부르키나파소** 파일: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국기.svg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민주방위국민회의 - 민주방위세력|
민주방위국민회의 - 민주방위세력
]]
[[부르키나파소군|
부르키나파소군
]]
[[폴리사리오 전선|
폴리사리오 전선
]]
에바리스트 은다이시미예 (초선) 이브라힘 트라오레 (권한대행) 브라힘 갈리
파일:상투메 프린시페 국기.svg 상투메 프린시페 파일:세네갈 국기.svg 세네갈 파일:세이셸 국기.svg 세이셸
[[독립민주행동당|
독립민주행동당
]]
파스테프당
[[세이셸민주동맹|
세이셸민주동맹
]]
카를루스 빌라 노바 (초선) 바시루 디오마이 파이 (초선) 와벨 람칼라완 (초선)
파일:소말리아 국기.svg 소말리아 파일:소말릴란드 국기.svg 소말릴란드 파일:수단 공화국 국기.svg 수단**
[[평화개발연합당|
평화개발연합당
]]
[[쿨미예 평화통일개발당|
쿨미예 평화통일개발당
]]
[[수단군|
수단군
]]
하산 셰흐 마하무드 (재선) 무세 비히 압디 (초선) 압델파타흐 알부르한 (주권위원회 의장)
파일:시에라리온 국기.svg 시에라리온 파일:알제리 국기.svg 알제리 파일:앙골라 국기.svg 앙골라
[[시에라리온 인민당|
시에라리온 인민당
]]
[[민족해방전선(알제리)|
민족해방전선
]]
[[앙골라 인민해방운동|
앙골라 인민해방운동
]]
줄리어스 마다 바이오 (3선) 압델마지드 테분 (재선) 주앙 로렌수 (재선)
파일:에리트레아 국기.svg 에리트레아 파일:에티오피아 국기.svg 에티오피아* 파일:우간다 국기.svg 우간다
[[민주정의인민전선|
민주정의인민전선
]]
[[무소속|
무소속
]]
[[민족저항운동|
민족저항운동
]]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초선) 테이 아스케슬라시 (초선) 요웨리 무세베니 (6선)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파일:잠비아 국기.svg 잠비아 파일:적도 기니 국기.svg 적도 기니
[[무소속|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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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개발통일당|
국가개발통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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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적도 기니)|
민주당
]]
압델 파타 엘 시시 (3선) 해케인드 히칠리마 (초선)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7선)
파일: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파일:지부티 국기.svg 지부티 파일:짐바브웨 국기.svg 짐바브웨
[[연합마음운동|
연합마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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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인민연합|
진보인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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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 아프리카 국민연합 - 애국전선|
짐바브웨 아프리카 국민연합 - 애국전선
]]
포스탱아르샹주 투아데라 (재선) 이스마일 오마르 겔레 (5선) 에머슨 음낭가과 (재선)
파일:차드 국기.svg 차드** 파일:카메룬 국기.svg 카메룬 파일:카보베르데 국기.svg 카보베르데
[[애국구원운동|
애국구원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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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룬 인민민주운동|
카메룬 인민민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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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보베르데 독립아프리카당|
카보베르데 독립아프리카당
]]
마하마트 데비 이트노 (초선) 폴 비야 (7선) 조제 마리아 네베스 (초선)
파일:케냐 국기.svg 케냐 파일:코모로 국기.svg 코모로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코트디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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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민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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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로의 부흥을 위한 대회|
코모로의 부흥을 위한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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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자의 집회|
공화주의자의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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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중인 군주 · 집권 중인 공산국가 지도부
재임 중인 총리 및 수상

[1] bachillerato laboral administrativo. [2] 부통령 테오도로 응게마 오비앙 망게, 광산 및 탄화수소 장관 가브리엘 므바가 오비앙 리마(Gabriel Mbaga Obiang Lima). [3] 대한민국이 박정희 정부이던 시기부터 현재까지 집권중이다. [4] 스페인에 국빈 방문할 당시에 촬영되었다. 원본 [5] 원문. 주성하는 삼촌(기사 원문에는 사촌형으로 잘못 기재됨)을 몰아내고 처형하며 집권한 독재자 오비앙을 두고 '천륜까지 버린 독재자'라고 혹평했다. [6] 블라디미르 푸틴보다 2배, 시진핑보다 4배 가까이 길게 집권한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체감이 잘 돼지 않는다면 오비앙이 권력을 장악할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7] 이는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불만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오비앙과 함께 다른 당대의 엘리트 적도 기니인들도 사라고사의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8] 여담으로 이 부대는 적도 기니에 정착한 스페인인들을 보호하는 헌병대였다. [9] 적도 기니 민주당 여성단체 명예회장을 역임한 바가 있다. [10] 오비앙은 망그 외에도 4명의 아내가 더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오비앙이 이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한 번에 여러 명의 아내를 뒀기 때문이었다. 사실 팡족 일부다처제를 원칙으로 한다. [11] 적도 기니의 수도인 말라보가 이 섬의 북쪽 연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한국으로 치면 경기도지사와 비슷한 위치의 직위이다. [12] 그가 수용소 소장을 맡기 시작한 정확한 년도는 불명인데, 1974년이라는 설도 있고 1975년이라는 설도 있으며, 1968년이라는 설까지 있다. [13] 실제로 마시아스 응게마의 재판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테오도로 오비앙은 1974년 이후 마시아스 응게마 시기의 적도 기니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 [14] 그 역시 오비앙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고문과 처형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다만 크메르 루주 집권 전에 수감자를 직접 고문했다는 주장이 있긴 하다), 수감자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며 수감자에 대한 심문과 고문 행위들을 감독했다. [15] 실제로 삼촌의 사형 선고 당시에는 1명이 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선고 직후에 오비앙에 의해 사면되었는데, 의미심장하게도(?) 그 사면된 사람은 바로 오비앙의 후임 블랙 비치 소장이던 살바도르 온도 엘라였다. 다만 사면된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일흔이 넘는 고령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으며, 이후 온도 엘라는 1982년에 몽고모 지역의 정부 대표로 임명되었다. [16] 오비앙은 1985년에 쓴 자서전 '젊은 나라 적도 기니(Guinea Ecuatorial, país joven)'에서 "'마시아스와 함께 행진하는 청년(Juventud en Marcha con Macías, 마시아스의 친위대로 쓰인 준군사 조직)'이 남긴 핏자국은 형언할 수 없다"고 유체이탈 화법을 써가며 언급하면서도 자신이 마시아스 응게마 시절에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7] 후술하듯 이들 중 실제 쿠데타 시도로 결론난 사건은 2004년의 사건 하나뿐이다. [18] 이는 적도 기니에서 쿠데타 시도를 이유로 '여러 시민들', 즉 민간인들을 재판에 회부한 최초의 사례다. [19] Severo Moto Nsá, 1943~. 1983년에 스페인에 망명하던 상황에서 적도기니진보당(PPGE)을 창당한 후 2020년까지 대표를 역임했으며, 2003년 8월 29일에는 마드리드에 적도 기니 망명정부를 세우기도 했다. 1997년 8월에 다른 11명과 함께 반역 혐의로 기소되어 궐석재판에서 무려 징역 101년형을 선고받은 적도 있다. [20] 실제로 짐바브웨 로버트 무가베 2008년에 전립선암 선고를 받아 '3~5년 내에 죽을 것'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절제된 식습관 덕분에 11년 후인 2019년까지 살 수 있었다. [21] 참고로 적도 기니에서는 2014년을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후술할 초유의 사법살인 사건의 여파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22] 많은 유권자들은 위협을 받으며 여당 후보를 뽑도록 강요받았고, 야당 참관인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군인의 아내들이 오비앙에 대한 대규모 투표에 동원되었고, 공무원들이 부재한 가족 대신 투표하는 일이 많았으며, 심지어는 투표용지(후술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쓰는 투표용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쓴다.)를 2개 이상 받은 사람도 있었다. [23] 정확히는 선거에서는 55석만 얻었으나, 대통령이 직접 15석의 상원의원을 임명해서 전체 상원의원 수는 70명이 되었다. [24] 2024년 3월 24일 총 집권일이 40년을 돌파했다. 사실 응게소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의 공백을 두고 2차례 집권했다. [25] 실권을 잡기 전의 직책까지 소급적용하면 폴 비야도 이에 해당한다. 비야의 대통령 집권은 오비앙보다 3년 늦은 1982년에 이루어졌지만, 사실은 이미 1975년부터 카메룬의 총리를 맡고 있었다. [26] 물론 삼촌을 몰아낸 이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이 아니라 상술한 것처럼 막내동생이 처형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쿠데타를 본인이 하지 않는다면 본인도 결국 마시아스 응게마 정권의 부역자로 몰려서 불이익을 받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7] 참고로 당시 무가베는 짐바브웨 달러로 대표되는 기록적인 초인플레이션,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자행된 부정행위와 폭력 사태로 이전보다도 더 악명이 높아졌던 상황이였고, 이 여파로 그 다음해인 2009년에는 워싱턴 포스트의 주말판 매거진 '퍼레이드'에서 선정한 세계 최악의 독재자 순위에서 오마르 알 바시르(2위)는 물론이고 김정일(3위)까지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28] 이는 타지키스탄,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동점이며, 적도 기니보다 순위가 낮은 나라는 북한& 에리트레아(3점), 투르크메니스탄(2점), 시리아& 남수단(1점) 이렇게 단 5개국밖에 없다. [29] 이들이 어느 정도로 비밀리에 구금되었냐면, 수감자들이 처형된 이후 정보가 공개되기 이전까지는 수감자들의 가족들조차 이들의 수감 여부를 몰랐을 정도였다. [30] 정작 적도 기니 당국은 전술한 대통령궁 습격이 일어날 당시에는 이 습격이 니제르델타 해방을 위한 나이지리아 반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 나이지리아인 7명과 적도 기니인 9명이 구금되고 수십 명의 나이지리아인이 추방되었다. [31] 재판 절차도 불공정하기 짝이 없었는데, 피고들의 변호사라며 법률 교육도 안 받은 군 장교 2명을 데려온 것은 물론이고, 검찰이 대통령 암살 미수의 증거라고 제시한 것도 오래된 소총 하나에 불과했다. [32] 참고로 적도 기니에서는 총살형이 주된 처형 방식이다. [33] 실제로 국제앰네스티 적도 기니 연구원 마리스 카스트로(Marise Castro)는 신속한 처형이 일반적인 적도 기니에서도 이 사건처럼 재판이 끝난 직후에 수감자를 사형에 처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34] 사족이지만, 사법살인 때문에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는 적도 기니 외에도 영국도 있다. 영국에서 티모시 에반스(Timothy Evans, 1924~1950)라는 남성이 1949년에 경찰의 부실한 수사로 자신의 아내와 13개월 딸을 살해한 범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경찰이 조작한 자백을 바탕으로 재판에 회부된 후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3월 9일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53년에 한 연쇄살인마가 이 사건의 진범이란 것이 밝혀지면서 영국에서 사형제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게 되었고, 결국 영국은 1965년에 아예 사형제를 폐지해야만 했다. [35] 시·의회·상원의원 선거에서 정당당 한 장의 투표용지가 인쇄돼 유권자들이 각 기관마다 다른 투표용지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야당의 투표용지가 없는 투표소가 허다했고, 투표가 시작되기로 예정된 시간으로부터 몇 시간 전에 투표가 시작된 데다가, 많은 투표소가 사전에 공지된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있어 야당 참관인이 올 수 없었으며, 여당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당을 찍을 것을 강요한 데다가, 이 투표에 반항하던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구금되었다. 거기다가 일부 야당 후보는 갑자기 당선이 무효 처리되었으며, 의미심장하게도 선거 당일에는 적도 기니의 인터넷 신호가 끊겼다. [36] 2005년에 설립된 반오비앙 야당이다. [37] 참고로 이드리스 데비 차드 대통령은 적도 기니의 쿠데타에 차드의 장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38] 이들 중에는 60세를 넘은 할머니도 있었다. [39] 이들 중 대부분이 여당인 PDGE와 관련된 인사였다. [40] 이들 중 2명은 15년 이상 스페인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던 사람들이었지만, 2019년 11월 12일에 스페인 시민권을 가진 다른 2명과 함께 남수단에 갔다가 3일 뒤에 적도 기니 당국에 납치되어 수감되었다. [41] 이들 중에는 야당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며 59년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1명 있었다. [42] 다만 2022년 기준으로는 이들 중 3명이 다시 수감된 것으로 보인다. [43] 최소 4년, 최대 29년 [44]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과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 [45] 29년은 당연히(?) 오비앙 당 대표에게 선고되었다. [46] 사실 1970년대의 아프리카에서는 폭정이 극심했던 독재자들 사이에서 식인 루머가 도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제로 마시아스 응게마 외에도 이디 아민(다만 이쪽은 루머라는 게 정설이다), 장 베델 보카사가 식인설로 악명이 높았고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과 오비앙의 후배인 찰스 테일러도 식인설이 돌았다. [47] 비슷한 시기에 짐바브웨 로버트 무가베 정권이 소년병을 양성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BBC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자 짐바브웨 정부가 이 다큐멘터리의 내용에 대해 '근거 없는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전면 부인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48] 사실, 삼촌 마시아스 응게마를 군사쿠데타로 몰아내 죽이고 새로운 대통령이 된 것은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될 지 몰라도 마시아스 응게마가 누구인지를 감안하면 아주 틀린 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악질 매국노나 다를 바 없는 행적을 보인 훈 센이 배반한 국가가 민주 캄푸치아라 매국노 취급받지 않는 것과 유사한 셈이다. [49] 참고로 이 링크에 따르면 적도 기니 국립 대학교에서는 오비앙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늦어도 2009년 이전에는 학위를 수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 [50] 미국의 한 가십 사이트에서는 이브가 데이트를 하던 오비앙 망게의 아버지가 식인을 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를 버렸다고 밝혔다. [51] 실제로 소모사 가문의 2대는 1대의 아들이 맞으나 2대와 3대가 형제 관계이다. 다만 소모사 가문은 권력의 공백 없이 이어온 '백두혈통'과 응게마 가문과는 달리 중간에 권력의 공백이 3번 있기에 북한은 커녕 응게마 가문에 비해서도 세습의 순수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물론 응게마 가문의 경우 2대 오비앙이 1대 응게마를 축출하고 살해한 뒤에 집권한 것이기에, 세습이 아닌 정권의 관료가 일으킨 쿠데타를 통한 집권에 가깝다. 오히려 북한 말고 일반적인 세습체제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국가는 시리아. 이쪽은 2대 세습이나 그 기간이 50년으로 적도 기니 다음으로 긴 축에 들어가며, 순수성도 아버지 하페즈가 장남에게 세습하려다가 그가 교통사고로 죽자 외국에서 살고 있던 바샤르에게 세습을 시킨 케이스다. [52] 사실 1996년에 석유가 발견되기 이전까지 적도 기니는 1인당 GDP가 1991년 기준으로 약 256달러(2022년 기준으로는 약 556달러)인 최빈국이었는데, 당시 말라보의 전화번호부는 이름만 나열한 두 페이지로만 구성되었고, 도시의 유일한 호텔에는 수도와 전기, 부엌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조차 없었다. 참고로 적도 기니에는 2024년 기준으로도 철도가 없다. [53] IMF 통계에 따르면 2008년에 적도 기니의 1인당 GDP는 약 2만 3347달러, 한국의 1인당 GDP는 약 2만 474달러로 추산되었다. [54] 이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 연속 취약국가지수 1위를 차지한 예멘(27.0%)보다도 낮은 수치다. [55] 과장 같아 보이지만 하술할 2006년의 통계를 보면 이는 과장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56] 적도 기니보다 부패인식지수가 낮은 나라는 예멘(176위), 베네수엘라(177위), 남수단& 시리아(공동 178위), 소말리아(180위) 5개국밖에 없다. 적도 기니와 부패인식지수가 동점이거나 그보다 더 낮은 국가들이 리비아를 제외하면 모두 대표적인 파탄국가로 악명이 높은 것을 감안하고 보면 적도 기니의 부정부패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다. [57] 면적이 울릉도의 1/5 정도인 17㎢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섬으로, 본토로부터는 남서쪽으로 500km, 수도가 있는 비오코 섬로부터는 600km 이상 떨어진 외진 섬이다. 마시아스 응게마 시절에 응게마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1972년부터 외부와 고립되어 핍박을 받아왔다. [58] 다만 역설적으로 극단적인 빈부격차 때문에 거의 모든 국민들이 석유로 얻은 '자원의 축복'을 전혀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석유 고갈이 적도 기니 주민들에게 입힌 타격은 없을 것이다. [59] 이후 압류되었다. SNS에 가끔 나도는 그 새하얀 베네노 로드스터 맞다. [60] 보이는 바와 같이 무가베의 경제 파탄, 탄 슈웨의 로힝야족 난민 문제, 베를루스코니의 성추문을 비꼬고 있다. [61] 수상 조건이 "정치, 사회, 학계의 저명한 인사들과 나라와 민족의 독립, 세계적 자주성과 인류의 평화와 문화발전에 특별한 공헌을 한 인물들에게 수여한다." [62] 이 기사를 쓴 사람이 바로 탈북자 출신 기자 주성하다. 다만 주성하가 마시아스 응게마의 만행을 전혀 몰랐는지는 몰라도 이 기사에는 마시아스 응게마의 만행에 대해서는 전혀 적혀있지 않으며,(실제로 오비앙이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도 삼촌이 본인의 조카(오비앙의 막내동생)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오비앙이 삼촌의 집권 기간에 저지른 만행들도 전혀 적혀있지 않다. 당연하지만, 마시아스 응게마의 만행이 테오도로 오비앙의 만행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63] 오비앙은 1992년 4월에 김일성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방북해 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이 사진에서 오비앙은 맨 밑의 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위치해 있다. 당시 사진 [64] 이 사람은 "조국통일과 국제정의를 위한 조선인민의 투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수십년간 주체사상을 연구보급하는데 힘써왔다."는 이유로 상을 수여받았다. [65] Lanny Davis, 1945 ~ 1996년부터 2년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특별 고문이었다. [66] 카부스가 오비앙보다 2세 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