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23 17:15:28

이그나티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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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그나티오스.jpg
이름 이그나티오스
(영어: Ignatios, 그리스어: Ιγνάτιος)
속명 니키타스(Niketas)
출생 798년
사망 877년 10월 23일
직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제 85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사후 정교회 가톨릭으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2. 생애

798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미하일 1세 랑가베스 프로코피아의 3남으로 출생했다. 본래 이름은 니키타스(Niketas)였다. 어렸을 때는 황족 대우를 받았지만, 813년 부친이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크룸과의 전투에서 패한 뒤 레온 5세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미하일 1세의 아들들은 모두 거세되고 수도원에 보내졌다. 이때 '이그나티오스'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그는 신앙 생활에 매진했다.

그는 성상 옹호론자로 성상 파괴주의가 극렬한 시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미르마라 해의 테레빈토스(현재 타브샨 섬)에 창립한 수도원장을 맡아서 성상 옹호자들의 피신처로 제공했다. 그러다 84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였던 메토디오스가 사망한 뒤, 어린 미하일 3세를 대신해 통치하던 테오도라에 의해 신임 총대주교에 임명되었다.

성상 파괴주의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던 그는 총대주교에 취임하자마자 당시 시라쿠사 대주교였던 그레고리오스 아스베스타스를 해임하면서 자신의 뜻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레고리오스는 레온 5세의 아들로, 성상 파괴주의자들을 심하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온건파의 지도자였다. 그는 이후에도 그레고리오스에 대한 규탄을 이어가다가 853년 종교회의에서 파문에 처했다. 아마도 종교적 이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거세시킨 황제의 아들인 점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레고리오스는 로마의 교황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이 복직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교황청은 확고한 성상 옹호론자로서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이그나티오스를 적으로 만들지 않으려 했다. 이에 온건파는 학자 포티오스를 지도자로 세워 총대주교에 대적하도록 했다. 포티오스는 테오도라의 오빠이자 테오도라가 실각한 후 섭정으로 등극한 바르다스의 조언자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르다스는 자신의 며느리와 사랑에 빠져 아내 테오도라와 이혼했다. 이그나티오스는 이를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858년 예수공헌축일에 바르다스의 성사를 거부하고 파문에 처했다. 바르다스는 이에 분개하여 그를 축출할 음모를 꾸몄다. 몇달 후, 미하일 3세는 어머니 테오도라와 두 여동생을 블라케르나이 근처의 카리아노스 수녀원으로 보내 삭발식을 거행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삭발식을 맡아달라는 황제의 요구를 거부했다. 바르다스는 기회를 포착하고 황제에게 총대주교와 테오도라가 동맹을 맺었다고 모함했다. 여기에 게베온이라는 자가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이 테오도라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바르다스는 이 자의 배후에 총대주교가 있다고 모함했다.

미하일 3세는 바르다스의 설득에 넘어갔고, 858년 11월 23일 그를 체포해 테레빈토스 섬의 수도원으로 유폐했다. 그 후 포티오스가 머리를 깎고 주교가 되었고, 그레고리오스 아스베스타스는 시라쿠사 대주교로 복직했다. 그러나 이그나티오스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총대주교에서 물러나지 않으면서 상황은 심각해졌다. 포티오스는 교황에 서신을 보내 자신을 총대주교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 니콜라오 1세는 포티오스의 취임 과정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서는 승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후 답신을 통해 이듬해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열자고 제안하면서, 자신도 두 명의 위원을 보내 그들로부터 보고를 직접 듣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레온 3세가 732년에 로마의 관할권에서 빼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로 옮긴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의 주교구, 테살로니키 교구, 기타 발칸 반도의 여러 관구를 다시 교황청에 반환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861년 4월, 아나니의 자카리아와 포르투의 로도알드가 교황의 사절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이후 사도 성당에서 진상조사위원회가 열렸고, 이그나티오스는 초라한 수도복을 입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회의는 처음부터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를 반대하는 증인이 72명에 달했고, 교황의 두 사절은 포티오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은데다 미하일 3세로부터 "그대들의 귀환은 전적으로 짐의 자비에 달려있다"라는 은근한 협박을 받은 터라 포티오스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결국 위원회는 이그나티오스가 교회법이 아니라 테오도라의 지시에 의해 총대주교에 임명되었으므로 무효라고 결의하고, 포티오스를 공식적으로 총대주교에 선임했다.

그는 위원회 직후 다시 체포되어 여러 차례 매질을 받았고, 2주일간 감금된 채 굶어야 했으며, 사도 성당의 납골당에서 콘스탄티노스 5세의 석관 위에 묶이기도 했다. 그의 의식이 흐려지자, 포티오스 일당은 펜과 그를 해임한다는 문서 한장을 내밀었는데, 포티오스의 서명 바로 위에 그의 서명란이 있었다. 결국 그는 더 버티지 못하고 거기에 서명하고 테에빈토스 섬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니콜라오 1세는 이 소식에 격노하여 두 사절을 비난했다. 게다가 포티오스가 위원회의 결과를 통보하면서 은근히 자신이 교황과 동격이라는 입장을 드러냈고,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테살로니키, 발칸 반도의 여러 관구를 로마의 관할에 속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황제께서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고 여기니 어쩔 수 없다고 하자 더욱 분노했다. 여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원의 총주교 대리를 맡던 테오그노스토스가 로마로 망명한 뒤 로마 교황을 존경하는 이그나티오스가 부당한 탄압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자, 교황은 포티오스를 인정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교황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에게 서신을 돌려 이그나티오스가 부당하게 해임되고 그 자리를 비열한 자가 가로챘으니 이그나티오스를 원래의 지위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를 알렸다. 또한 미하일 3세와 포티오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로마 교황의 권한이 가장 우월하며 교황의 승인이 없이는 총대주교가 임명되거나 해임될 수 없음을 재차 강조했다. 미하일 3세와 포티오스가 답신을 보내지 않자, 교황은 863년 4월 라테란에서 종교 회의를 소집해 포티오스의 모든 성직을 박탈하고, 총대주교의 모든 권한을 즉각 포기하지 않을 경우 파문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포티오스가 임명한 다른 성직자들에게도 비슷한 선고가 내려졌고, 이그나티오스를 비롯하여 포티오스에게 해임된 모든 성직자들을 원직에 복귀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포티오스에게 회유되어 그릇된 처사를 한 아나니의 자카리아는 교구에서 해임되었다.[1] 이에 포티오스는 교회 회의를 열어 서방 교회의 교리를 비판하고 니콜라오 1세 교황을 파문했다.

867년, 바실리오스 1세 미하일 3세를 암살하고 새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등극 직후 포티오스를 총대주교에서 해임하고 이그나티오스를 총대주교로 복직시켰다. 그는 복권 직후인 870년 불가리아 차르에게 라틴 주교들을 불가리아에서 추방하도록 설득했다. 차르 보리스 1세는 로마 교황이 갈수록 고압적인 태도로 나오는 것에 불만이 있던 데다 보야르들의 반란을 수습하려면 동로마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이에 따라 가톨릭 선교사들을 내보내고 정교회로 복귀하기로 했다. 그 후 포티오스를 따랐던 인사들을 복귀시켜서 교회의 요직에 앉혔으며, 874년 또는 875년 포티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는 것에 동의했다. 자신을 그토록 혹독하게 탄압했던 포티오스 일파를 너그럽게 처분한 동기는 불확실하나, 정교회 관할 지역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관리 문제가 대두되자 지식인이 많았던 포티오스의 지지자들을 마냥 배척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877년 10월 23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뒤를 이어 총대주교가 된 포티오스는 자신의 옛 숙적이었던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고, 가톨릭 또한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축일은 10월 23일이다.

[1] 로도알드는 이때 처벌받지 않았지만, 864년 11월에 열린 종교 회의에서 해임 처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