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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0066><colcolor=#ece5b6> 후당 추존 황제
이국창 | 李國昌 |
|
성씨 | 주야(朱耶) → 이(李) |
휘 | 적심(赤心) → 적충(赤衷) → 국창(國昌) |
부모 | 부황 의조 |
배우자 | 문경황후 |
자녀 | 5남 3녀 |
묘호 | 헌조(獻祖) |
시호 | 문경황제(文景皇帝) |
사망 | 887년 |
능묘 | 장녕릉(長寧陵) |
재위기간 | 제6대 추장 |
835년 ~ 8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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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대십국시대 사타족의 6대 수장으로 본명은 주야적심(朱邪赤心), 이명은 적충(赤衷)이다. 당나라에 이름 이국창(李國昌)을 사성받았고 그의 이씨는 아들 이극용, 손자 이존욱까지 이어졌으며 이존욱이 후당을 건국하자 헌조(獻祖) 문경황제(文景皇帝)로 추존되었다.2. 생애
835년, 아버지 주사집의가 죽자 사타 수장의 자리를 계승하였다.839년, 위구르 제국의 재상 굴라물(掘羅勿)과 연합하여 아이 텡그리데 쿠트 볼미쉬 알프 퀴췰뤽 빌게 카간을 죽이고 압삽특근을 괴뢰 가한으로 옹립하였다.
869년, 당나라를 도와 방훈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워 이국창(李國昌)이란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서주관찰사(徐州觀察使), 사경성(賜京城)의 관저 1곳을 하사받았다.
877년, 이가거(李可擧)[1], 혁련탁(赫連卓)[2], 백의성(白義誠)이 합심하여 울주(蔚州)에 있는 이국창을 공격하였고 이국창은 혁련탁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아들 이극용과 함께 북쪽의 타타르로 도주하였다. 이후 아들 이극용이 황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이국창은 대북(代北) 절도사에 봉해졌다.
923년, 손자 이존욱이 후당을 건국하자 묘호 헌조(獻祖), 시호 문경황제(文景皇帝), 능호 장녕릉(長寧陵)으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