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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훈(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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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勳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행적3.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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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로 원소의 부하였으며, 원술의 수하에 있던 후한의 군웅 유훈과는 한자까지 동일한 동명이인이다.

2. 행적

호아도위를 지내다가 장양 항복시키는 공울 세웠지만, 이를 시기하였던 원소 그의 공을 가로채고자 트집을 잡아 유훈을 죽였다고 한다.

공손찬이 원소와 전쟁을 벌일 때, 그의 죄상에 관한 표를 조정에 상주문으로 올려 원소가 부하들이나 지방관들에게 한 악행에 대해 10가지 죄상으로써 이를 논했는데, 그 중에서 유훈은 일곱번째의 죄상에 해당되었는데, 원소와 유훈은 처음에는 합심하여 군사를 양성하여 적잖은 공적을 세웠지만, 그는 사소한 일에 분노하여 억울하게 많은 사람을 죽였고 더 나아가 유훈은 이에 대해 참소하는 사특한 자를 신용하였으며 이에 대해 항소를 하는 공이 있는 자를 살해했다고 논했다.

장양이 항복한 때는 191년이었고, 공손찬이 헌제에게 상주문을 올린 것은 192년이었기 때문에 유훈은 191년 또는 192년에 죽은 것으로 생각된다.

배송지의 주석에 따르면 유훈의 자(字)가 자황(子璜)으로 유자황과 동일인물로 추측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3. 기타 창작물

소설 비열한 성자 조조에서 원소 휘하에서 종군사마를 지내고 원소가 사례교위에 임명되자 중군영의 일을 맡았으며, 십상시의 난 하진의 병사들이 조근, 반은을 실수로 죽였다는 것을 원소에게 알렸다. 이후 동탁이 정권을 잡자 양주군에게 자신이 이끄는 군영의 군량미를 빼앗겼으며, 병사를 이끌고 원소를 섬겼지만 기주 점령 이후 봉기의 참언에 원소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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