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2 15:17:27

유종무(명군이 되어보세!)

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柳宗茂/立花宗茂

명군이 되어보세! 2부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동일인물이다.

조선식 이름인 유종무(柳宗茂)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영지인 야나가와 성(柳川城)에서 따온 이름이다.

2. 작중 행적

혼노지의 변에서 노부나가를 구한 대가로 규슈의 대영주가 된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어 경인왜란에 참전한다. 명예와 신의를 중시하는 성격이라서 노부나가가 조선 백성들을 약탈 및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도 실행하지 않았다. 학살은 그렇다 쳐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물이 도움이 된다며 기술자들과 도자기들을 약탈하던 다이묘들이 많았음을 고려하면 특이한 부분.

동래성 포위전에서 원군으로 온 서득운 휘하 경상좌병영군 15,000명을 5,000명의 병력으로 격파한다.
유유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간 노부시게가 적의 깃발을 보고 중얼거렸다.
"타치바나군이시로군."
"그렇소, 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요. 우리말이 능숙한데, 그대는 누구요?"
"사나다 노부시게. 조선 국왕의 신하이자 부마요."
투구 위의 육문전을 두드리며 쓴웃음을 지은 노부시게가 마지막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용맹으로 이름 높은 그대를 만나 반갑소만, 길은 열어드릴 수 없소. 이 앞으로 더 가려면, 우리 시체를 밟고 지나가야 할 거요."
노부시게 휘하에 남은 기병들은 이미 삶에 대한 미련 따위는 모두 잊었다.
"됐으니까 떠나시오. 이미 승패는 끝났고, 전과도 충분히 거뒀소. 본진의 상황도 수상하니 돌아가봐야 하는데, 고작 백여 명에 불과한 그대들을 굳이 쫓을 필요도 없소. 곧 해가 저물 텐데 무리해서 추격하는 것도 안전하지 않고."
"동정이오?"
"아니요. 그대가 주군을 위해 바치는 충정과 오늘 벌인 분투에 대한 경의요. 만약에 상황이 허락한다면 다음 싸움에 만나도록 합시다."
무네시게가 망설일 것 없다는 듯 방향을 돌리자 당황한 부장이 옆으로 붙었다.
"주군, 저 자는 조선 국왕의 사위라 합니다. 그런 큰 전공을 그냥 보내신단 말입니까? 설사 거짓이라 해도 붙잡아서 손해를 볼 일은 없습니다!"
"주군을 위해 위험한 후위 임무를 맡아 저토록 당당하게 싸운 자다. 이미 승패가 갈렸는데 굳이 사사로운 공적을 위해 목을 벨 필요는 없다."
의리야말로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목숨을 거는 최고의 가치였다. 의리를 지키는 자를 존중한다는 신념은 그가 평생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킬 것이었다.

하남벌 전투에서 초소카베군과 함께 복병을 맡아 오위 본진을 쳐 오위군을 붕괴시키는 데에 큰 공을 세운다. 오위군이 패퇴한 후 하남벌 전투에서 위기에 몰린 사나다 노부시게를 생포할 기회가 있었지만 명예와 신의를 중시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는 사나다 노부시게가 왕의 사위라는 말을 듣고도 그에 대한 경의로서 추격하지 않고 놓아주었고, 그 말을 들은 주인공 이재석은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호감을 가져 죽이지 않고 생포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에 노부나가는 가볍게 질책하지만 크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그 후 조선의 반격으로 양산성에서 재석이 이끄는 조선 친정군에게 포위되지만 조선군의 포격은 참호를 파서 피하고 부하 1,500명을 잃었으나 조선군도 300명 죽인 후, 포위망을 돌파하는 등 사흘 동안 조선군의 진군을 저지하며 양산성을 빠져나간다. 재석과 이항복도 이제 왜군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단병접전의 비중이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중.

노부나가가 죽고 왜군이 전면적으로 철수하는 중에도 스스로 철수를 최후까지 엄호하는 신가리 역할을 맡아 권율의 북방군을 지연전으로 괴롭힌다. 재석은 무네시게에게 목숨을 빚진 사노부가 "무네시게를 되도록 생포해 회유해달라"고 부탁하여 고려해보라고 말했으나 권율은 그 말을 꼭 생포해야지 죽이면 안 된다는 어명으로 오해하고 강하게 몰아치지 못해 무네시게의 지연전에 큰 피해를 입고, 재석은 이를 알고 내리갈굼을 본의 아니게 일으킨 것을 후회하면서 저항이 심하면 그냥 죽이라고 명한다.

그러나 끝까지 살아남아 바닷가까지 밀려났으나 재석이 사노부와 이덕형을 보내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배반하였으니 조선과 손잡고 히데요시를 쳐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는 것이 어떤가 하고 마지막 회유를 하자[1] 결국 회유를 받아들이고 주군인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도망쳐 신의를 저버린 히데요시를 벌하기 위해 조선에 항복한다.

귀순 후 유씨 성을 받았고, 5년 뒤 을미동정에서 조선의 일본 침공에 참전하였고, 신의의 상징이었던 그가 조선에 귀순했다는 사실에 일본군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귀국하면서 일본에 남겨뒀던 아내 타치바나 긴치요와 재회하고 그 사이 히데요시가 긴치요를 겁탈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노해서 긴치요와 화해한다.[2]

이후 조선군 편으로 앞장서서 히데요시 토벌전을 벌인다. 을미동정 이후 포상으로 치쿠고를 영지로 받게 되고 양응룡의 난 정벌 원정에 500명의 병력과 함께 자원한다.

이후 2부와 3부 사이에 진서대장군부는 폐지되고 조선 직할령인 북규슈 3젠을 제외한 규슈 지방은 에도 막부의 손에 들어왔지만 타치바나家는 여전히 감봉 없이 존속 중이며[3] 과거의 은혜를 잊지 않고 계속 친조선 성향의 번으로 언급된다.

3. 기타

배신과 모살이 난무하는 센고쿠 시대의 무사임에도 진심으로 명예와 신념을 중시하여 하남벌 전투에서 사나다 노부시게가 일본 사무라이의 방식대로 직접 앞에 나와 나노리를 하자 이에 어울려주고, 왕의 사위임에도 주군을 위해 신가리를 자처한 사나다 노부시게를 그냥 놓아주는 장면이 인상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 조선 정부에서도 인상적이었는지 주인공인 이재석뿐만 아니라 권율도 무네시게에게 히데요시의 건을 들어 마지막 기회를 주었을 정도. 학살이나 약탈에 관여하지 않았고 조선 기준에서도 무네시게의 미학은 칭찬할 만한 것이었으니 이상할 건 없다.

경인왜란이 원 역사 임진왜란보다 조선의 피해가 적었다지만 하삼도에서 입은 피해의 잔혹성은 별 차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중세 일본 사무라이의 로망을 몸소 실현하는 언행 때문에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4부에서 19세기까지도 타치바나 가문이 무네시게의 친조선 성향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으며, 조선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보고 있다는 것과 본작에서 무네시게가 긴치요와 화해한 점을 들어 본작에서는 긴치요와 화해한 뒤 자식을 가졌고 그 후손이 타치바나 가문의 번주 자리를 이어나간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제기하고 있다.


[1] 무네시게가 조선 백성들을 해치지 않은 점도 감안해 마지막 기회를 준 것. [2] 원 역사의 타치바나 무네시게는 원래 타카하시(高橋) 가문 출신으로 타카하시 쇼운의 아들이었지만 아들이 없던 타치바나 도세츠의 데릴사위가 되어 타치바나의 당주가 되었다. 정확히는 도세츠가 무네시게의 재능을 알아보고 쇼운에게서 빼앗은 것에 가깝지만. 하지만 긴치요는 규슈 제일의 미녀이자 여걸이었음에도 사이가 매우 나빠서 도세츠가 죽자마자 긴치요와 별거했고, 무네시게는 결국 아들을 두지 못해 조카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이었다. 하지만 1595년 당시 무네시게와 긴치요 모두 20대고, 아무리 사이가 나빴다지만 젊고 예쁜 아내를 딴 남자가 빼앗으려 했다는 말을 들으면 생각이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다. 5년 동안 히데요시에게 원 영지를 안 뺏긴 게 긴치요 덕이기도 하고. [3] 원 역사에서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편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에도 살아남았고 가이에키를 당해 빼앗긴 영지도 돌려받아 기어코 다이묘 자리를 되찾은 유일한 인물이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