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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문화 류씨 |
출생 | 1921년 9월 9일 |
황해도
안악군 대행면 적둔리[1] 16번지 (現 황해남도 은천군 남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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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7년 5월 16일 (향년 85세) |
서울특별시 | |
학력 | 니혼대학 (문과 / 중퇴)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2층-212실-131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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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노동운동가, 정치인.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했다.2. 생애
1921년 9월 9일 황해도 안악군 대행면 적둔리 16번지(現 황해남도 은천군 남산리)에서 태어났다.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문과 2학년 재학 중 학병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 강제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끌려갔다. 그 뒤 1942년 4월 탈영해 한국광복군 한교전지공작대 난징지구의 특파원이었던 조일문과 접선한 후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한 것으로 보인다.
3. 독립운동
한국광복군에 입대한 뒤 제 3징모분처에서 한교전지공작대 공작대원으로 활동하였다. 공작대원으로서의 임무는 일본군의 정보 수집 및 정탐, 일본군 내 한국인들에 대한 선무공작 및 탈출 협조 등이었으며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 저장성(浙江省) 등의 지역에서 활동했다.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서 공작활동을 벌이던 중, 1944년 10월 난징의 헌병부대에 갇혀있던 이일범, 난징 일본 특무부대에 갇혀있던 조일문등 광복군 동지들이 지역을 탈출하면서 한국광복군 제 3전구(戰區) 지역인 안후이성(安徽省) 광더현(廣德縣, 현 쉬안청시 광더시) 마오린(茂林)으로 합류하였다.
1945년 6월 일본군이 한국광복군 제3전구 지역에 대한 소탕 작전을 펼쳐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해일(金海一) 등과 함께 제 3전구 유격진구에서 공작 중이던 박승학(朴承鶴)을 방문하던 중 공작대원들과 함께 안후이성 쉬안청시(宣城市) 지에시현(結溪縣)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는데 합류한 유격부대와 함께 치열한 전투를 감행하며 탈출하여 전원이 안후이성 휘주현(徽州縣, 현 황산시 후이저우구)으로 집결하였다.
4.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하자, 징모 제 3분처에서는 간부 20명을 중심으로 적군지역에 대한 초모 확대반 5개조를 조편성하여 파견계획을 완비하던 중 적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여 총사령부 지시에 의한 적 점령지구 내의 교포 생명/재산 보전 및 한적 장병 수용 임무를 구축하고자 각 지구에 선발대를 파견하였으며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우후지구(蕪湖地區) | 박승학 |
난징지구(南京地區) | 이일범, 박철원, 피문성 |
상하이지구(上海地區) | 김룡, 박시준 |
항저우지구(抗州地區) | 전호인, 정영호[2], 유익배 |
등이 파견되어 소임직무를 완축하였다.[3]
5. 정치 입문
귀국 후. 신익희 휘하에 있으면서 우익운동과 노동운동에 종사하였다. 유익배는 일찍부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단 산하에 정치공작대[4] 신설을 기획해 신익희에게 제안했으며, 1945년 12월 정치공작대 중앙요원으로서 안병성(安秉星)· 정희섭[5]과 함께 평안남도 평양부에 잠입하였다. 이때 유익배 등은 조만식을 만나 월남을 촉구했으나 "내가 월남하면 북조선 동포들은 누굴 의지하며 산단 말인가"란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남한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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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전진한 등과 함께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6] 설립에 참여하였고 이때부터 좌익 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대립하였다. 또한 대한혁신청년회 및 서북청년회의 고위 간부들과 혈맹관계를 이루며 우익 정치인으로서의 활동도 이어 나갔다. 당시 서북청년회에서는 월남한 청년회원들을 여러 기업체에 소개해 노동조합 간부로 자리잡게 하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는데, 당시 대한노동총연맹 조직부장으로 있던 유익배는 그들의 경력을 살펴보고 일제강점기 때 경찰이나 밀정으로 일한 자들이라면 기업체에서 노동조합 간부로 채용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었다. 이유인 즉,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대한노동총연맹이 기업체에 친일 경력자들을 적극적으로 주선해준다는 식으로 일종의 흑색선전 자료로 삼기 때문이었다. 이에 일부 서북청년회 하부조직원들은 유익배의 이와 같은 정치적 고려를 헤아리지 못하고 "유익배 부장이 일부러 우리의 취업길을 막는다"라며 속칭 빨갱이로 몰아 그를 납치해 폭행하는 등 이른 바 린치를 가하는 사건이 있었다.
서북청년단 소속 청년들 중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이나 밀정을 하던 자들의 노조간부 취업을 막다가 속칭 빨갱이로 몰려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서북청년단 간부들이 린치를 가한 청년들에게 '이 분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꾸짖어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나, 좌익 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흑색선전 자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다른 광복군 출신 청년들이 조선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 활동에 집중된 반면 대한노동총연맹 활동에 참여해 1947년 3월 17일 제1회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국제정세를 보고했으며, 1948년 1월 23일 조직부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청년부장에 선임되었다가 1950년 3월 30일 다시 조직부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에서 한국시찰단을 파견하기로 하자, 대한노동총연맹에서는 4월 8일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때 조사위원에 선임되었다.
1956년 9월 30일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당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 연이어 1957년 10월 21일에도 중앙상무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959년 3월 개최된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결성대회에서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2월 14일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 14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1966년 11월 19일 중앙노동위원회 상임위원에 임명되었고, 1969년 9월 27일에는 앞서 대한조선공사(당시 사장 남궁련)의 노사분쟁수습에 있어서 정부의 긴급조정권에 의한 직권조정이 실패하자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으로서 직권중재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1977년 11월 30일에는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했다.
이후에도 노동운동 및 개인사업에 종사하다가 2007년 5월 16일 서울특별시에서 서거했다. 그의 유해는 2007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2층 212실 131호에 안장되었다.
6. 참고자료
- 독립유공자 공훈록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6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28·44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