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유호백 (柳虎伯) |
자 | 덕화 (德和) |
출생 | 1904년 1월 5일[1] |
경상북도
안동군 동후면 주진동 삼산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삼산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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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년 1월 25일[2] (향년 41세) |
경상북도 안동군 | |
본관 | 전주 류씨[3]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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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류인식은 그의 큰아버지이다.[4]
2. 생애
유면희는 1904년 1월 5일 경상북도 안동군 동후면 주진동 삼산(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삼산마을)에서 아버지 유만식(柳萬植)과 어머니 의성 김씨 김서락(金瑞洛)의 딸 사이의 5남 8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5]그는 1926년 당시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생으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동교생 이선호(李先鎬)로부터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이라는 계획을 듣고 이에 가담하였다. 그는 동교생 임종업(林鍾業)·이현상(李鉉相) 등을 동지로 포섭하고 이들에게 국장당일 살포할 격문 및 태극기 등을 나누어주었다.
이윽고 거사일인 6월 10일, 그는 이선호·임종업·이현상 등과 함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국장행령을 봉송하고 난 뒤 학생들의 행렬 앞으로 나아가 각기 휴대하고 있던 격문을 살포하는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그는 현장에서 일경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6월 20일 6.10 만세 운동 학생주동자 11명과 함께 기소되어 1927년 4월 1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45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유면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3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