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소련이 형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22년 11월 19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하르키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학교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그 덕분에 1940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엔 이집트학을 전공하였다.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지 불과 1년만에 독소 전쟁이 발발하여 그가 거주하던 지역은 나치 독일군과의 전쟁에 휘말렸으며, 이 때문에 전란을 피해 피난을 다니느라 학업에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1943년에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는가 하면, 힘겹게 학업을 마치고 졸업한 뒤 전쟁이 끝나자 독일 점령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스탈린 정권에 의해 나치 부역자라는 낙인이 찍혀 대학원 진학을 거부당하는 등 대학 시절 내내 불우한 일들을 계속해서 겪었다.
1.1. 마야 문자 해독
그러던 중 학부생 시절에 교수로부터 마야 문자와 관련하여 논문을 쓸 것을 제안받은 일을 계기로 크노로조프는 인생에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마야 문자는 읽는 법이 소실되어 마야 문자로 쓰인 글들은 해독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마야 문명은 베일에 싸인 신비의 문명이었다. 크노로조프는 16세기 스페인의 디에고 데 란다(Diego de Landa)라는 주교가 쓴 "Relación de las Cosas de Yucatán"( 유카탄 지역에서의 문물들에 대하여)라는 문서에 주목하였는데, 이 문서는 마야 문자 음가를 다른 문자(로마자)로 대응시켜 적어놓은 유일한 자료였기 때문이다. 이에 크노로조프는 Relación de las Cosas de Yucatán에 쓰인 내용을 토대로 마야 문자를 해독하려는 시도를 시작하게 되었다.어떤 미해독 문자에 대하여, 다른 문자로 그 문자를 읽는 법이 쓰인 자료를 발견한다면 그 문자를 해독하는 데에 비약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야 문자로 쓰인 언어인 마야어는 비록 크노로조프 당시에는 더이상 마야 문자로 표기되고 있지는 않았으나 입말은 마야인 원주민들이 계속 사용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Relación de las Cosas de Yucatán을 토대로 마야 문자의 음가를 마야어에 대입하면 마야 문자를 읽는 법을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Relación de las Cosas de Yucatán는 로제타 석과 같은 역할을 해줄 열쇠가 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마야 문자의 체계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지 못 한다는 점이었다. Relación de las Cosas de Yucatán에는 마야 문자가 로마자와 같은 음소 문자 체계라고 설명하고 있었으나, 실제 마야 문자가 쓰인 사료들을 살펴보면 전혀 음소 문자의 방식대로 표기되고 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크로노조프는 여러 해 동안 Relación de las Cosas de Yucatán의 내용을 토대로 마야어의 음소 배열 등을 마야 문자 사료들과 대조해보며 통계적으로 분석한 끝에 마야 문자는 단순한 음소 문자가 아닌 음절 문자와 음소 문자가 혼재한 체계이며 그 외에도 다른 문자 체계에는 없는 여러 가지 독자적인 표기 법칙이 존재하는 문자 체계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마야 문자로 쓰인 글의 일부 내용을 인류 최초로 해독해내었고, 1952년에 이를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그의 논문은 일부 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대체로 학계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일례로, 이전부터 마야 문자가 순수한 표의문자라고 줄곧 주장하였던 에릭 톰슨(Eric Thompson)이라는 영국의 마야학자는 크노로조프의 마야 문자의 음소를 밝혔다는 논문의 내용에 대해 전혀 터무니 없다며 엄청난 비판을 쏟아냈으며, 마야학계는 전반적으로 크노로조프의 연구 결과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크노로조프에 대한 학계의 이러한 반응은 톰슨이 당시 마야학계에서 권위적인 위치에 있는 학자였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을 것이고, 또 제 1세계권 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학계 특성상 그가 적성국인 소련 출신의 학자라는 점 때문에 견제 심리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노로조프는 위축되지 않고 계속해서 마야 문자 해독 연구를 내놓았고, 크노로조프의 연구 내용에 동의하는 학자들이 점점 생겨났다. 이전부터 마야학 연구를 주도한 최고 권위자 에릭 톰슨의 영향력 때문에 톰슨이 생존해 있을 적에 마야학계는 크노로조프의 연구 성과를 인정하기를 꺼렸지만, 1975년 에릭 톰슨이 사망하자 비로소 마야학계는 크노로조프의 연구를 따라서 마야 문자 해독 시도에 대대적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렇게 크노로조프의 방법에 기반하여 해독 연구가 거듭된 결과, 현대에 들어 마야 문자로 쓰인 글은 대략 60% 가량이 이해될 수 있고 읽는 것은 80%까지도 가능해졌다고 한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으나 마야 문자를 전혀 읽지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크노로조프 이전 시대에 비교하면 획기적인 진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 마야 문명의 역사의 일면에 대해 알 수 있게 된 것은 크노로조프의 연구 덕택이다. 따라서 그는 이후 명성과 찬사를 얻었다. 특히 멕시코, 과테말라 등 마야 문명이 자리했던 메소아메리카의 몇몇 나라들에서는, 자국의 역사를 확장하여 준 공로로 국민적 영웅으로 찬사받고 있다.
크노로조프는 1999년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1]
크노로조프의 연구 결과의 진가를 알아보고 초기부터 지지한 학자는 타티아나 프로스쿠랴코프(Tatiana Proskouriakoff), 마이클 코(Michael D. Coe) 등 소수였다. 이들 역시 훗날 크노로조프를 도와서 마야 문자 해독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