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99년 5월 2일 |
평안남도 강서군 | |
사망 | 1964년 7월 6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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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유기준은 1899년 5월 2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무렵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서울에서 발발하자, 그는 여기에 가담하 각 전문학교 대표들과 함께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한 연통제에 가담해 평안남도 특파원의 임무를 맡아 1919년 8월 재입국했다.이후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계몽과 선전, 임시정부의 정책 계몽, 독립사상의 고취, 연통제 및 교통국의 설치, 국내 지도자와의 협의, 독립운동 단체조직, 정세 파악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평양 기성의원에서 체포되었으나 취조 중 탈주하여 1920년 1월 다시 상해로 갔으며, 임시정부 군무총장 이동휘의 권유로 국무원의 서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흥사단 원동지부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11월에는 대한적십자회 정기총회에서 상의원(常議員)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 12월에는 상해한인구락부를 발기 조직하였다. 1922년 7월에는 범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으로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해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의 사무원이 되었으며, 1923년부터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활동에 참여하여 1937년까지 동회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39년 12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가 되었다가, 1940년 8월 21일에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언도되었으며, 1941년 2월 17일 고등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되어 출옥할 때까지 미결수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4년 7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유기준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여담
돌아가신지 60년이 다 되어가는 2023년 연말에 향아치 방송서 간접적으로 등장했다. # 유기준 선생의 손자가 임시정부 요인 사진[1], 독립선언서 사본, 한중협회[2] 상무위원 임명장을 공개했다.[3]유기준 선생의 손자 본인이 직접 댓글을 달아 항상 자랑스러운 할아버지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