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다이 William Dy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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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윌리엄 매킨타이어 다이 William McEntyre Dye |
출생 | 1831년 1월 26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워싱턴 | |
사망 | 1899년 11월 3일 (향년 68세) |
미국 미시간주 머스키건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이집트 육군 조선군 시위대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대령 이집트 육군 대령 |
복무 기간 |
1853~1870(미군) 1873~1878(이집트군)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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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펜실베이니아주 워싱턴에서 태어났고 185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861년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북군 대위로 제20아이오와의용보병연대 소속으로 참가했고 이후 프랜시스 J. 히론이 이끄는 제2보병사단 2여단의 지휘관이 되었다. 프레리그로브 전투에서 여단을 이끌었고 빅스버그 전투 당시 증원병력으로 참전했다.이후 여러전투에 참가했고 전시계급 준장까지 올라갔다. 전후 소령으로 복귀했고 1870년 대령으로 제대했다.
북군 장성였던 태디어스 P. 모트는 이집트의 총독 이스마일 파샤에게 다이를 추천하면서 이집트군을 현대화하는 데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도움을 받을 것을 제안했다. 1873년 이집트 육군 대령으로 복무했으며 당시 동료 찰스 포머로이 스톤은 다이에게 아비시니아와의 전쟁에서 참모총장이 될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참모차장으로 임명되어 참모총장 윌리엄 윙 로링을 도와 에티오피아-이집트 전쟁에 참전했다. 다이는 구라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이후 이집트 장교를 때린 혐의로 군법재판에 회부됐다.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고 1878년 고용됐던 미군들이 해고되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1880년에 이집트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펴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워싱턴 DC에서 경찰국장으로 일하다가 필립 셰리든의 추천으로 조선으로 향해 군사고문관이 되었다. 하지만 연무공원에서의 조선군 시위대 교육은 여러 가지 이유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는데, 학생들이 엄격한 군대 훈련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미국인 교관들은 약속된 봉급을 제때 받지 못해 사기가 낮았으며, 교관들은 사관뿐만 아니라 일반 군인들도 훈련을 시켜야 하는 등 업무가 과중해 효과적인 교육을 할 수 없었다.
결국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할 당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장해제당했다.[1] 이후에도 시위대 대장으로 시위대를 훈련시켰다. 하지만 을미사변당시 300며의 시위대와 기습한 일본군 공사관 병력, 낭인과 전투를 치렀으나 무기, 탄약의 부족으로 무너졌다. 이후 제1시위대대장 이학균, 호러스 뉴턴 알렌등 여러 각국 외교관과 함께 을미사변을 증언했다.
1899년 미국으로 돌아가 그 해 사망했다.
[1]
이 당시 조선군의 무기, 탄약을 죄다 향원정 연못에 빠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