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02:04:19

위디 아일랜드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위디 아일랜드 참사.jpg

1. 개요2. 사고 당시3. 사고 이후

1. 개요

Whiddy Island Disaster

1979년 1월 8일 아일랜드 위디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유조선 폭발 사고.

2. 사고 당시

프랑스 유조선 MV 베텔기우스(M.V Betelgeuse)는 1968년에 Chantiers de l'Atlantique in Saint-Nazaire에서 만든 유조선으로, 프랑스 Total S.A. at Le Havre 소속이었다. 1978년 11월 베텔기우스 호가 걸프만을 떴다. 배는 115,000톤에 달하는 원유를 싣고 포르투갈의 레이숑이스(Leixoes)로 향했다. 원래는 배 무게를 조금 줄이려고 리스본 남쪽의 시네스(Sines)에 잠시 정착하려 했으나, 날씨가 너무 나빠 정착하지 못했다. 레이숑이스로 향하면서도 배가 조금 가라앉아 레이숑이스에 도착하지 못했다. 선장은 배를 아일랜드에 위치한 위디 아일랜드 유류 터미널에 들리기로 했다.

12월 30일, 배는 스페인 비고에 잠시 들려 기존 승무원들이 내리고 새 승무원들이 탑승했다. 배는 이후 위디 아일랜드 유류 터미널로 향했다. 중간에 비스케이 만에서 풍랑을 만났고, 풍랑 때문에 석유가 새어나오는 사고가 있었다. 문제를 보고 한 후 프랑스 브레스트(Brest)로 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기름이 세어나오는 곳을 발견한 뒤 멈췄고, 1월 4일, 원래 계획 된 항로 였던 벤드리 베이에 도착했다. 1월 6일 오후 8시, 배는 위디 아일랜드에서 약 1,300 피트 떨어진 부두에 정착해 원유 114,000톤을 배출했다. 배출하는데 시간이 36시간이나 걸려 승무원들은 잠시 배에서 내려 쉬었고, 승무원 아내 한명이 같이 배를 타고 싶어 베텔기우스 호에 올라타기도 했다.

1월 8일 월요일, 오전 1시. 베텔기우스 호에서 갑자기 갈라지는 소음이 들리더니 배가 폭발했다. 폭발음은 56km 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배에서 엄청난 양의 원유가 흘러나오고 원유에 불이 붙었다. 베텔기우스 호는 급히 구조요청을 했다. 원래대로면 위디 아일랜드에서 불을 끄러 달려와야 했다. 하지만 당시 담당이 휴가를 낸 터라 불을 끄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베텔기우스 호에서 가장 가까운 배는 약 7분 거리에 떨어져 있어 도착하는데 늦었다. 불로 인해 인근 바다마저 끓어올라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인근 마을에서 소방대원이 출동하긴 했으나, 배에 접근하는게 사실상 불가능해 일단 유류 터미널에 최대한 불이 번지지 않게 막았다. 주변 마을 사람들은 급히 대피했다.

폭발 12시간 후, 베텔기우스 호 앞부분이 40m 아래 바다로 가라앉았다. 가라앉으면서 불도 꺼졌다. 뒷부분은 남은 채 계속해서 타올랐다. 2주가 지나서야 구조대원이 접근할 수 있었다. 구조대원과 소방대원은 배에 올라타 남아있는 원유를 빼내고, 시신을 수습했다.

사고로 51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 42명이 프랑스인, 7명이 아일랜드인, 영국인이 1명, 그리고 네덜란드인이 1명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후술할 다이버 사망자도 있었다. 베텔기우스 내의 시신 중 27구 만 온전히 수습할 수 있었다.

3. 사고 이후

사고 원인으로 베텔기우스 호의 시설 관리 부실, 직원 교육 부족, 그리고 소방 장비 및 인력 부족 등이 뽑혔다. 더 정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시신은 벤트리 만 인근 교회의 공동묘지에 묻히게 됐다.

이후 1억2천만 달러를 들인 베텔기우스 호 인양 작업이 진행됐다. 인양 작업 도중 다이버 한명이 사고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벤트리 만 공동묘지엔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