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05 01:46:47

우즈베키스탄-위구르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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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위구르
1. 개요2. 문화적 관계3. 역사적 관계4. 관련 문서

1. 개요

우즈베키스탄 위구르의 관계. 위구르에는 주로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상인들이 와서 활동한다.

2. 문화적 관계

남북한처럼 하나였던 우즈벡과 위구르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권은 제정 러시아의 잔존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이었던 중앙아 무슬림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특히 제국령에 산재한 여러 투르크 지역민들을 각자의 '민족'으로 승격시켜 자주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언어·역사학자들은 과거에 파묻힌 '우즈벡'과 '위구르'라는 명칭을 꺼내 들었다. 스탈린의 조종을 받던 동서 투르키스탄의 정주(定主) 투르크 지도자들 역시 수차례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이 같은 민족명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러한 소련식 프레임에 저항하는 지도자도 있었다. 키르기즈스탄 톡막(Toʻqmoq) 출신의 우즈벡이자, 1944년 신장 북부에서 중국을 격퇴한 무슬림 혁명군의 리더 알리 한 토라(Alixon Toʻra Sogʻuniy)가 바로 그였다.

유년시절 메디나와 부하라에서 아랍·페르시아어 교육을 마친 알리 한 토라는 전통적인 투르크 엘리트에 속했으며, 평생을 중앙아 투르크인의 자주해방을 위해 분투한 인물이다. 그는 투르크 무슬림들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우즈베키스탄'이란 개념을 거부하고 '투르키스탄'이란 명칭을 고집한 바 있다.
중국에 굴복해 '독립투사' 거처 훼손한 나라

고대 말부터 근세까지 카슈가르 - 사마르칸드 - 부하라 - 메르브 - 니샤푸르 루트는 이른바 실크로드의 핵심 교역로에 해당했었다. 카슈가르는 신장 최서단의 도시이고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영토가 되었다. 메르브는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니샤푸르는 오늘날 이란 동부에 해당한다.

우즈베크인과 위구르인은 언어-문화적으로 보면 사실상 같은 민족으로도 분류 가능하다. 상술한 이유로 역사적, 문화적으로 공통 분모가 많을 수 밖에 없었는데 일단 우즈베크인들의 직계 기원 중 하나인 카라한 칸국은 무슬림 위구르인들의 기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튀르크계 카라한 칸국은 타지크계 사만 왕조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으며 카슈가르와 호탄을 이슬람화하였다. 카라한 칸국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카슈가르에서 수학한 후 바그다드로 가서 튀르크어 사전을 편찬한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를 들 수 있다. 카슈가리는 우즈베크인들과 위구르인들이 모두 기념하는 위인이기도 하다. 이후 차가타이 칸국을 거치며 우즈베키스탄과 동튀르키스탄의 농민들은 점진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튀르크어족 차가타이어파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들은 오늘날 우즈베크인과 위구르인들의 기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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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크어(빨간색)와 위구르어(녹색) 사용 인구의 분포

우즈베크라는 민족 명칭은 근세 초 세워진 우즈베크 칸국에서 기원한다. 위구르라는 민족 명칭은 20세기 초반 위구르 민족의 기원과 역사를 연구한 소련 출신 세르게이 말로프라는 사람이 동튀르키스탄의 무슬림 농민들과 중세 코초 위구르국 사이의 연관성을 따서 명명한 이름이다. 근세에서 근대 당시에는 무슬림이라는 종교 정체성이 우선되었지 따로 근대화된 민족 정체성이 우선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양자 간에는 서로를 타자화하는 일은 드물었다.

청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약간의 문화적 차이가 생긴 위구르인들은 소련 시절 친소 군벌 정권 성스차이 정권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두 개의 다른 민족으로 분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우즈벡인과 위구르인이 서로 가까운 사이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도 카자흐스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장 위구르 문제에 대해 딱히 이렇다 할 주장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

3. 역사적 관계

18세기 중반 이후 위구르인들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청나라는 위구르 상인들이 청나라 국경 너머 해외로 무역하는 것을 상당부분 통제하였다. 이로 인해서 위구르 상인들의 교역 범위는 대폭 축소되었고 이에 따라 이웃한 우즈베크인들과의 교역도 크게 축소되었었다. 위구르인들은 식사를 할 때 젓가락을 사용하는데 비해 우즈베크인들은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코칸트 칸국이 신장 지역 서부를 지속적으로 침공한 것을 계기로, 결국 청나라는 코칸트 칸국이 신장 지역과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도록 허가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수십년 동안 묶여있었던 위구르인들과 우즈베크인들 사이의 교역이 증대되었다. 비교적 부유했던 코칸트의 우즈베크 상인들은 카슈가르 야르칸드에 정착하여 현지 위구르인 여성들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때가 많았다.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우즈베크인들은 이렇게 상업활동 와중에 신장에 정착한 우즈베크 상인들의 후손이다.

이후에도 1881년 러시아 제국과 청 왕조 사이에 체결된 ‘상트페테르부르그 조약’에 따라 러시아 제국 국적 상인의 청나라 영내 상업 활동에 특권이 부여되었고, 당시 러시아 국적을 가진 우즈베크인들 상당수가 신장 각지의 대도시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이주 배경으로 중국 내 우즈베크인들 중 농업이나 목축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비교적 드문 편이고, 상당수가 도시 지역에서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다.

2000년 기준 중화인민공화국 영내 우즈베크족은 전체 인구의 43.61%가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데, 이는 중국 내 소수민족 전체 평균 도시거주 비율(11.87%)는 물론 중국 전체 평균(23.55%) 및 한족의 도시거주 비율(24.64%)보다도 훨씬 높은데, 중국 내에서 러시아족의 도시거주 비율(63.23%) 및 조선족의 도시거주 비율(45.86%)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준도시화 지역인 진(鎭) 거주비율 24.82%를 합할 경우 전체 인구의 68% 이상이 도회지에 거주한다. 향촌 지역 거주비율은 31.57%로 낮은 편이다. 출처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안디잔에도 소수의 위구르 난민들이 거주한다.

중국 정부의 압박으로 타슈켄트 주정부가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알리한 투라의 저택을 없애고 거리 이름을 개칭하게 만든 것이 알려졌다. #
결국 2018년 5월 알리 한 토라의 저택은 철거됐고 그 주변은 허허벌판으로 변했다. 중국 대사는 새 건물을 짓겠다고 약속하고선 막상 목적을 달성하자 입을 싹 닫았다. 이후 3년이 지나도록 공터로 남아 있는 해당 부지에는 잡풀만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즉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중국의 서북공정에, 그것도 뻔한 속임수에 보기 좋게 당한 셈이다.

중국 대사관 측은 해당 역사유적을 없애면 새로 건물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2018년 해당 유적이 철거된 이래 기사가 쓰여진 시점까지 허허벌판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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