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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과거 참가 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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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체 구단은 회색 바탕으로 처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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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버팔로 | |||
Chonbuk Buffalo | |||
정식 명칭 | 전북버팔로축구단 | ||
영문 명칭 | Chonbuk Buffalo Football Club | ||
법인명 | ㈜제7전북프로축구단 | ||
창단 | 1993년 1월 16일([age(1993-01-16)]주년) | ||
해체 | 1994년 11월 24일([age(1994-11-24)]주년) | ||
구단 형태 | 기업 구단 | ||
소속 리그 | 코리안리그 (1994) | ||
연고지 | 전라북도 (1993~1994) | ||
홈구장 | 전주공설운동장 (1993~1994 / 28,000석) | ||
구단명 변천 |
완산 푸마 (1993.01.16.~1993.11.03.) 완산 제우 엑스터 (1993.11.04.~1994.02.21.) 전북 엑스터 (1994.02.22.~1994.03.17.) 전북 버팔로 (1994.03.18.~199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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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구단주 | 문수기[1] | ||
최종 감독 | 김기복 | ||
마스코트 | 버팔로[2] | ||
상징색 | 파랑 | ||
유니폼 |
홈 - 파랑 / 어웨이 - 흰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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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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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사상 최다 연패 (10연패)[3] |
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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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1 베스트 일레븐 (1회) |
1회 김경래 (1994) |
[clearfix]
1. 개요
1993년 전라북도를 연고로 창단해 K리그에 참가했던 프로 축구단이다. 전주종합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호남 지역 최초의 프로 축구단이었지만 창단 이듬해 해체했다.구단 해체 후 선수단을 전북 다이노스가 수용했지만 구단을 인수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공식적으로 양 구단은 별개의 구단이다. 그러나 전북 다이노스의 창단 주축 선수단 가운데 전북 버팔로의 선수가 많았다는 점과 동일한 연고지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전북 버팔로를 전북 다이노스의 정신적 전신이라 보기도 한다. 더불어 전북 버팔로의 해체는 K리그에 가입금 제도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2. 시즌별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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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버팔로 시즌별 일람 |
시즌 | 리그 | FA컵 | ACL | CWC | ||||||||||
디비전 | 리그 | 순위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차 | 승점 | ||||
1994 | 1부 | 코리안리그 | 7 | 30 | 3 | 5 | 22 | 30 | 62 | -32 | 14 | - | - | - |
3. 창단
호남 지역, 그중에서도 전라북도를 연고로 한 프로축구단의 창단은 그야말로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1991년 국내 최초로 컨소시엄 형태의 프로축구단을 표방한 전라 진돗개 구단이 출범을 선언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처음 목표로 잡은 1992년 리그 참가가 무산됐다.1993년 1월 스포츠 용품 업체인 푸마를 끌어들이면서 완산 푸마[4]로 구단명을 변경하여 그 해 리그 참가를 노렸으나 구단을 둘러싼 악성 루머, 제7 구단 입단이 예정된 선수들의 드래프트 거부 등으로 곤란을 겪었다. 이로 인해 황선홍[5]은 완산에 지명 받았지만 이흥실 등의 선수들을 상대로 한 사상 초유의 4+4 이적 및 트레이드 합의로 포항 아톰즈에 입단하게 된다. 완산 푸마는 결국 선수 등록 시한을 지키지 못하고 리그 참가를 이듬해로 연기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선수단 월급을 체불한 사실이 알려졌다. 정확히는 월급이 현찰이 아닌 어음으로 지급했고 이게 부도 처리가 되면서 선수 등록 시한을 어겼던 것.
1993년 11일 메인 스폰서를 PC 생산 업체였던 제우정보[6]로 교체하며 구단명이 제우 엑스터로 변경했다.
최종적으로 1994년 2월 16일 법인 설립과 동시에 다시 구단명을 전북 버팔로로 변경하며 같은 해 3월 보배주조[7] 대표인 문수기 구단주가 재정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창단 승인을 받게 되어 힘겹게 1994년 K리그에 참가할 수 있었다.[8] 초대 감독은 김기복으로 최종 결정했다.
4. 역대 구단주
전북 버팔로 역대 구단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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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초대 | ||||
문수기 (1993) |
- 초대 - 문수기
5. 역대 감독
전북 버팔로 역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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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rowcolor=#ffffff> 초대 | ||||
김기복 (1993) |
- 초대 - 김기복
6. 선수단
전북 버팔로 1994 시즌 스쿼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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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 이름 | 포지션 | 국적 | 생년월일 | 신체 조건 |
김동훈 | GK | 1966년 9월 11일 | 180cm / 78kg | |||
성원종 | GK | 1970년 9월 27일 | 185cm / 79kg | |||
임학양 | GK | 1969년 8월 25일 | 183cm / 78kg | |||
이태형 | MF | 1964년 9월 1일 | 173cm | |||
김경래 | MF | 1964년 3월 18일 | 173cm / 64kg | |||
정한호 | MF | |||||
문영래 | MF | 1964년 3월 6일 | 188cm | |||
이태훈 | MF | 1971년 6월 7일 | ||||
주경철 | FW | 1965년 2월 22일 | 174cm / 68kg | |||
유승관 | MF | 1966년 1월 12일 | 175cm / 73kg | |||
백송 | MF | 1966년 8월 15일 | 170cm / 62kg | |||
이주영 | MF | |||||
김영진 | DF | |||||
강원길 | DF | 1968년 3월 17일 | 176cm / 75kg | |||
노주섭 | DF | |||||
성은준 | DF | 1970년 8월 20일 | 180cm / 78kg | |||
이승규 | DF | 1970년 | ||||
장기정 | DF | |||||
오유진 | DF | |||||
이경춘 | DF | 1969년 4월 14일 | 183cm / 76kg | |||
이종훈 | FW | 1970년 9월 3일 | 179cm / 76kg | |||
김용훈 | FW | |||||
정민 | FW | 1970년 11월 29일 | 181cm / 75kg | |||
김성호 | FW | 1970년 5월 16일 | 175cm / 66kg | |||
김영섭 | FW |
당시의 정확한 등번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K리그 기록실에는 경기마다 번호가 다르게 나와 있다.
7. 해체
구단의 만성적인 자금 부족 문제는 시즌 중에도 선수단에게 고스란히 부담으로 전가되어 훈련장은커녕 선수단 숙소도 마련하지 못했고[9], 홈 경기 수입으로 원정 비용을 마련하는가 하면 담당 기자들이 출장비를 모아 전북 버팔로 선수단의 식사비를 마련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국가대표 선수들을 비롯한 다른 구단 선수단에서 전북 버팔로를 돕는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김기복 감독은 경기의 승패 문제보다, 경기 후 선수들을 어디로 데려가서 먹이고 재워야 하나 같은게 더 문제였다고 얘기했다.
당시 구단주였던 문수기 보배주조 대표는 사비를 4억원이나 들여 구단을 지원했으나 결국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메인 스폰서였던 보배주조 내부에서도 전북 버팔로 지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다.[10] 결국 1994년 9월 6일 연맹 이사회에서 구단 해체를 전제로 그 해에 한해 전북 구단의 운영을 맡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즉 이때부터 동년 11월 12일 일화전을 마지막으로 해체할 때까지 전북 버팔로는 K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연맹 직영 구단이었다.
시즌이 끝난 후 현대자동차의 협력 업체인 현양이 전북 버팔로의 선수들과 계약해 1994년 12월 12일부터 전북 다이노스라는 새로운 구단으로 출범하게 됐다.[11] 이때 전북 버팔로 구단은 직접 인수되지 않고 해체 후 재창단 형식으로 갈 곳 없는 선수들만 다이노스에 받아들이는 형식이 됐는데[12][13] 이는 당시 신인 드래프트에서 신생 구단에게 주어지는 특혜를 노린 결과로 보인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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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1 과거 참가 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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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체 구단은 회색 바탕으로 처리한다. | ||||
▲ K리그1 현재 참가 구단 | ||||
▽ K리그 과거 참가 구단 |
[1]
문병량 보배 창업주의 아들.
[2]
따를 수 없는 힘과 고고한 정의로움이 함께 교감하는 이름-버팔로!
결속을 지향한다! 결코 흩어지지 않는 버팔로의 단단한 속성처럼 승리만을 쟁취한다!
거친 벌판을 질주하는 버팔로의 강인한 자태를 이어받아 지혜롭게 승부한다!
힘을 삭힐 때와 내뿜을 때를 바로 아는 버팔로의 영리함을 닮아 시선을 독차지한다!
발딛는 곳마다 활기를 쏟아붓는 버팔로의 힘찬 매력처럼 경기장 마다에서 벌이는 힘찬 걸음질,
각자의 역량보단 팀의 존엄성을 우선하는 곹추, 힘겹더라도 포기할 줄 모르는 강한 불굴의 투지,
버팔로 축구단의 뛰는 경기장에서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3] 2012년 상주 상무 FC의 리그 보이콧으로 인한 14연패를 제외한 최다 기록. 기준으로도 여전히 유효하다. [4] '완산'은 전주의 옛 지명인 완산주에서 따온 명칭이다. 완산이라는 이름은 현재도 전주시 완산구로 남아 있다. [5] 사실 이런 식으로 신생 구단의 지명을 피해 우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대의의 경우 대전 시티즌에 지명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3년 후에 귀국해 성남 일화 천마의 지명을 받는다. [6] 1995년 부도로 인해 사라졌다. [7] 지금은 사라진 전북 연고(본사가 익산시 소재)의 주류 업체로 전북지역 소주였던 ' 보배소주'를 만들어 팔았다. 아랫동네 연고 주류업체인 보해양조와는 다른 회사다. IMF 외환위기 이후 경영난을 겪었고 하이트진로가 이 회사의 권리를 인수한 후 2013년 합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 이 과정에서 메인 스폰서인 제우정보의 후원 금액이 당초 알려진 12억이 아닌 3억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9] 선수들이 텐트촌에서 자고 식사를 텐트촌 바닥에 돗자리판 깔고 해결하는 일도 있었다. [10] 당시 보배주조도 자금 사정에 큰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북 지역의 열악한 시장성 탓에 지역 주류업체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경영 여건에 놓였고,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존폐의 위기에 몰릴 정도로 흔들리다가 결국 하이트에 인수 합병돼 사라졌다. 그나마 보배소주는 하이트소주로 명맥을 이어갔지만, 그마저도 하이트가 진로를 인수한 후로는 참이슬이 전북권 시장을 꽉 잡은 상태. [11] 김덕중, '잊혀진 K리그 제7 구단', 《스포츠 2.0》제91호(2008.2.18); 홍재의, <K리그 꿈의 구장> 제9, 10탄 '전주종합운동장'편. [12] 다른 종목에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단이 만들어진 사례가 있다. KBO 리그의 SK 와이번스와 히어로즈다. SK 와이번스는 전북 연고 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된 후 개별 계약 형태로 선수단을 인수하면서 새 구단을 창단했고 히어로즈 역시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 이후 유니콘스 선수단을 승계하게 된다. [13] 이 과정에서 기존 전북 버팔로 선수 중 이승규는 병역 문제를 이유로 전북 현대 입단을 거부 당해(정작 그는 제2국민역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할 수 있었다.
결속을 지향한다! 결코 흩어지지 않는 버팔로의 단단한 속성처럼 승리만을 쟁취한다!
거친 벌판을 질주하는 버팔로의 강인한 자태를 이어받아 지혜롭게 승부한다!
힘을 삭힐 때와 내뿜을 때를 바로 아는 버팔로의 영리함을 닮아 시선을 독차지한다!
발딛는 곳마다 활기를 쏟아붓는 버팔로의 힘찬 매력처럼 경기장 마다에서 벌이는 힘찬 걸음질,
각자의 역량보단 팀의 존엄성을 우선하는 곹추, 힘겹더라도 포기할 줄 모르는 강한 불굴의 투지,
버팔로 축구단의 뛰는 경기장에서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3] 2012년 상주 상무 FC의 리그 보이콧으로 인한 14연패를 제외한 최다 기록. 기준으로도 여전히 유효하다. [4] '완산'은 전주의 옛 지명인 완산주에서 따온 명칭이다. 완산이라는 이름은 현재도 전주시 완산구로 남아 있다. [5] 사실 이런 식으로 신생 구단의 지명을 피해 우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대의의 경우 대전 시티즌에 지명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3년 후에 귀국해 성남 일화 천마의 지명을 받는다. [6] 1995년 부도로 인해 사라졌다. [7] 지금은 사라진 전북 연고(본사가 익산시 소재)의 주류 업체로 전북지역 소주였던 ' 보배소주'를 만들어 팔았다. 아랫동네 연고 주류업체인 보해양조와는 다른 회사다. IMF 외환위기 이후 경영난을 겪었고 하이트진로가 이 회사의 권리를 인수한 후 2013년 합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 이 과정에서 메인 스폰서인 제우정보의 후원 금액이 당초 알려진 12억이 아닌 3억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9] 선수들이 텐트촌에서 자고 식사를 텐트촌 바닥에 돗자리판 깔고 해결하는 일도 있었다. [10] 당시 보배주조도 자금 사정에 큰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북 지역의 열악한 시장성 탓에 지역 주류업체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경영 여건에 놓였고,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존폐의 위기에 몰릴 정도로 흔들리다가 결국 하이트에 인수 합병돼 사라졌다. 그나마 보배소주는 하이트소주로 명맥을 이어갔지만, 그마저도 하이트가 진로를 인수한 후로는 참이슬이 전북권 시장을 꽉 잡은 상태. [11] 김덕중, '잊혀진 K리그 제7 구단', 《스포츠 2.0》제91호(2008.2.18); 홍재의, <K리그 꿈의 구장> 제9, 10탄 '전주종합운동장'편. [12] 다른 종목에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단이 만들어진 사례가 있다. KBO 리그의 SK 와이번스와 히어로즈다. SK 와이번스는 전북 연고 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된 후 개별 계약 형태로 선수단을 인수하면서 새 구단을 창단했고 히어로즈 역시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 이후 유니콘스 선수단을 승계하게 된다. [13] 이 과정에서 기존 전북 버팔로 선수 중 이승규는 병역 문제를 이유로 전북 현대 입단을 거부 당해(정작 그는 제2국민역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