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노벨생리학·의학상 수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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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란트슈타이너[1] | 오토 하인리히 바르부르크 |
찰스 스콧 셰링턴 에드거 더글러스 에이드리언[2] |
Otto Heinrich Warburg 오토 하인리히 바르부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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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88,#ff0> 출생 |
1883년
10월 8일 독일국 바덴 대공국[3] 프라이부르크 |
사망 |
1970년
8월 1일 (향년 86세) 서독 서베를린 |
국적 | 독일 |
분야 | 세포생물학, 생화학 |
학력 |
베를린 대학교 (
화학 / 박사) (190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 의학 / 박사) (1911년) |
지도교수 |
헤르만 에밀 피셔 루돌프 폰 크릴 (Albrecht Ludolf von Kreh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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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tto Heinrich Warburg( 1883년~ 1970년)독일의 생화학자로,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유대계[4] 독일인 은행가 가문 바르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아비 바르부르크와는 먼 친척 관계라고 한다.[5]
2. 업적
그는 산소의 생물학적 작용과 세포호흡에 관한 연구의 권위자였다. 바르부르크는 헤모글로빈처럼 산소와 결합하는 철이 함유된 헴(heme)기를 가진 사이토크롬 효소군을 최초로 발견한 공로로 1931년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이 연구는 세포의 호흡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 외에도 대사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생체화합물인 FAD와 NAD+의 작용 기작을 규명하고, 암세포는 정상 세포에 비해 산소 소모량이 적다는 것도 밝혀낸 인물이다. 이렇게 산소가 충분한 상황에서도 암세포가 산화적 인산화가 아니라 무산소 과정인 해당과정을 선호하는 것을 그의 이름을 따 바르부르크 효과라고 한다.바르부르크는 개신교 어머니와 유대인 혈통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다. 나치가 권력을 잡았을 때, 비록 예외를 두었지만 유대인 후손들은 그들의 직업적인 위치에서 쫓겨났다. 1935년 뉘른베르크 법에 따르면 바르부르크는 1/2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독일 시민권 부여되긴 했다. 게다가 평생 독신이었던 바르부르크는 비서이자 조수인 야콥 하이스와 함께 살면서 일했던 관계 때문에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나치 치하에서 위기가 2개나 되었지만 바르부르크는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어도 연구는 계속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1941년, 바르부르크는 나치 정권에 비판적인 발언을 한 이유로 잠시 자리를 잃었지만, 몇 주 만에 히틀러로부터 개인적인 명령을 받아 연구를 재개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어린 나이에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여의고 암에 집착했는데, 나치는 바르부르크가 신진대사와 암에 집중했기 때문에 기꺼이 일을 하도록 허락했다. 괴링은 또한 그를 4분의 1 유대인으로 분류하도록 주선했으며, 1942년 9월, 바르부르크는 아예 명예 아리아인으로 분류되었다.
1944년에도 효소 연구의 공로로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어 수상 가능성이 농후하였으나 결국 수상되지 않았는데, 이는 나치 정권이 유대인인 그가 노벨상을 받지 못하게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령 수상했더라도 나치가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했으므로 그 해에 상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