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타 린타로 | |||
<colbgcolor=#068fb0> 출생 | 1826년 3월 30일 | ||
일본 에도 | |||
사망 | 1883년 1월 13일 (향년 56세) | ||
일본 도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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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양아버지 오키타 카츠지로(沖田勝次郎) 양어머니 ??? 부인 오키타 미츠 형 이노우에 소조 부인의 남동생 오키타 소지 부인의 여동생 오키타 킨 |
1. 개요
오키타 린타로[1]는 에도 시대 후기의 일본 사무라이로 신초구미의 쿠미가시라였다.2. 생애
1826년 에도 히노에서 이노우에 린타로[2]로태어난 그는 이노우에 소조의 남동생이었고 이노우에 긴자부로의 가족과 관련이 있다.그는 나중에 오키타 카츠지로[3]의 양아들이 되었고 1846년 카츠지로의 딸 오키타 미츠와 결혼하기 전에 오키타 린타로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그는 데릴사위가 되어 오키타 소지를 대신해 오키타 가문의 수장으로 일했다.
1863년, 그는 오키타 소지와 이노우에 겐자부로와 함께 로신구미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들이 교토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로시구미는 해산되었고, 그와 나머지는 에도로 돌아갔다.
다만 오키타 소지, 이노우에 긴자부로 그리고 몇몇은 그곳에 남아 신선조가 된다.
한편 당시, 그와 미츠는 아이들과 함께 다누마 오키타카의 전 에도 거주지에 있는 막사 중 한 곳으로 이사했다. 그들은 보신 전쟁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보신 전쟁이 시작된 후, 그와 미츠는 북부 영토의 군대와 전 막부의 병사들이 도호쿠 지역으로 퇴각할 때까지 말기 아픈 오키타 소지를 돌보았다.
쇼나이 다이묘 사카이 타다즈미와 함께 도시를 떠나면서, 린타로와 그의 가족은 쇼나이로 여행했다.
다만 소지는 결핵에 걸려 여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린타로와 미츠는 그를 에도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린타로는 이후 보신 전쟁의 절정기에 쇼나이 군대와 함께 싸웠다.
1872년, 그 가족은 도쿄로 돌아와 스미다 무카이지마의 우메야시키[4]라는 곳에서 살았다.
이후 린타로는 1883년 2월 13일 도쿄에서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여담
주변인물인 오키타 소지와 이노우에 긴자부로에 의해 가려져서 그렇지,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정말 기구한 삶을 살았다.그가 오키타 소지를 따라 에도에 남아 신선조가 되었다면 어떻게 살았을지도 흥미를 유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