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3 18:31:13

오므리 왕조

1. 개요2. 상세3. 외교4. 역사
4.1. 오므리 시기4.2. 아합 시기4.3. 아하시야, 여호람 시기4.4. 멸망과 그 이후
5.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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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이스라엘 왕국의 세번째 왕조인 오므리 왕조에 대한 문서 오므리 왕조지만 아합의 영향력 때문인지 '아합 왕조'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상세

열왕기에서 등장하며 열왕기 내내 가장 극렬하게 까인다. 이유는 이방신인 바알을 숭배했다는 것. 이 때문에 금송아지 숭배를 한 것은 똑같음에도 오므리 왕조를 없앴다는 이유만으로 예후의 평가는 다른 이스라엘의 왕들보다는 좋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므리 왕조는 건국 후 수십년간 툭하면 왕조가 바뀌는 북이스라엘의 혼란을 정리하고 몇대 정도의 안정적인 세습을 통해 100여년에 달하는 북이스라엘의 안정기를 마련한 왕조이다. 특히 아합의 경우 남유다 왕국, 아람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침공을 물리쳐 아시리아의 팽창을 억제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주변국에서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בת עמרי. 베트 오므리, 비트 훔리. 즉 "오므리 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3. 외교

  • 유다
    아합 시기의 결혼동맹으로 흔치않게 유다와의 관계는 좋았다. 그러나 이것도 후대의 시각으로는 대등한 관계라기보다는 유다가 이스라엘 왕국에 끌려다니는 관계로 보고 있다.
  • 아람
    오므리 시기만 빼면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아시리아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서 힘을 합친 적도 있지만 이쪽과는 대게 사이가 나빴으며 특히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후대의 분석으로는 아람이 오므리 왕조의 멸망에 영향을 주었다는 시선도 있다.
  • 모압
    아합 시기에 일시적으로 복속시켰으나 아합 사후 모압은 이스라엘 왕국의 복속에서 벗어난다.

4. 역사

4.1. 오므리 시기

오므리는 본디 이스라엘의 군사령관이었으나 시므리가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던 엘라를 시해하고 왕이 되자 군대의 지지를 업고 시므리를 제거하고 왕이 된다. 그러나 디브니라는 또다른 실력자라 왕위에 올라 4년간 이스라엘 왕국은 내전을 벌이고 최종승자가 된 것은 오므리였고 이렇게 오므리 왕조가 시작된다.

왕위에 오른 오므리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를 옮겼는데 이곳이 바로 사마리아로서 이후 북이스라엘 왕국은 멸망할 때까지 사마리아를 수도로 했다. 즉 북이스라엘 왕국을 사마리아 왕국이라고도 부르고 북이스라엘 왕국의 유민들을 사마리아인을 부르는 것은 오므리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4.2. 아합 시기

오므리는 재위 12년만에 사망했고 이후 그 아들 아합이 즉위했다. 그런데 아합은 구약에서 가장 강도높게 까일 정도로 이방신 바알 숭배를 들여온 군주로서 그 이유에는 페니키아계 도시인 시돈의 공주인 이제벨과 결혼한 영향이 컸다. 현대의 시각으로는 당시 시돈은 지중해, 서아시아권에서 지금으로 치면 뉴욕급의 대도시였기에 아합이 이제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견해가 있으며 성경에서도 아합의 바알 숭배 추진은 거의 이제벨의 주도로 서술되며 정작 아합은 특별히 야훼 신앙을 탄압하지도 특별하 바알 신앙을 중시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인다.

어찌야 되었건 신앙과는 별개로 아합은 상당히 유능한 군주로 추정되는데 자신의 딸인 아달리야를 남유다에 시집보내 동맹관계를 맺고 아람과의 전쟁에서도 이겼으며 특히 '카르카르 전투'에서 자신이 맹주가 되어 아람, 유다 그 외 몇몇 나라[1]와 동맹을 맺고 참전하여 결과적으로 이 전투에서 아시리아의 침공을 막아내어 아시리아의 팽창을 1세기 늦추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아합은 얼마 못가 재위 22년만에 유다와 연합하여 길르앗 라못을 침공했다가 난전중에 아람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4.3. 아하시야, 여호람 시기

이후 아합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즉위하지만 겨우 재위 2년만에 난간에서 떨어져 사망하며 아합의 사망으로 모압이 떨어져 나가는 일이 벌어졌으며 이후 아하시야의 동생인 여호람이 즉위했지만 여호람 시기에는 아람의 침공까지 받기도 했다. 그래도 유다, 에돔과 연합하여 모압을 침공하고 아람의 침공을 막아내는 등 아주 상황이 막장은 아니었다.

4.4. 멸망과 그 이후

여호람은 재위한지 9년만에 군사령관이던 예후의 역성혁명에 휘말려 살해당했으며 예후는 아합의 모든 후손들을 싸그리 다 죽였고[2] 아합이 들여온 바알 신앙도 바알 선지자들을 모조리 척살하여 아작을 내버린다. 아합의 외손자이자 남유다 왕인 아하시야 역시도 예후에게 살해당했다. 이후는 예후 왕조로 이어진다.[3]

그러나 오므리 왕조는 아주 잠깐 더 이어지게 되는데 아합의 딸이자 남유다 왕 여호람의 왕비인 아달리야가 스스로 왕위에 올라 남유다를 통치했기 때문. 그러나 대제사장 여호햐다를 주도로 하여 아달리야를 죽이고 다윗 왕조 혈통의 요아스를 왕으로 세워 오므리 왕조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나 요아스는 아달리야의 손자인 관계로 오므리 왕조의 혈통은 다윗 왕가에서 모계로나마 이어지게 된다.

다만 예후는 자신이 오므리 가를 몰살시키고 즉위한 것과는 별개로 주변국에는 자신이 오므리 가의 자손이라고 말했는지 오므리 왕조가 망하고도 앞서 말했듯 주변국에서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오므리 왕가라 불렀다.

5. 계보


[1] 아시리아측 기록에는 열두 왕이라고 되어 있다. [2] 이제벨도 이 때까지 살아있었는데 그녀 역시도 예후에게 살해당했다. [3] 참고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의 국경이 뚫리게 되어 결국 길르앗, 아로엘, 바산 일대가 아람에게 넘어가버렸고 예후 사후에도 시달리다가 예후의 손자인 요아스 대에야 일단 유다의 침공과 아람의 침공을 막아내고 역으로 고토의 일부를 회복하는 성과를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