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8 22:00:14

아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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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합 Ahab
출생 기원전 935년경
미상
사망 기원전 852년경
길르앗 라못
소속 미상
재위년도 기원전 874년~기원전 853년
약 22년
국적 북이스라엘 왕국
아버지 오므리
배우자 이제벨
자녀 아하시야, 아달리야, 여호람
이전 국왕 오므리
다음 국왕 아하시야

1. 개요2. 왕위에 오르다3. 엘리야와의 대결4. 아람과의 전쟁5.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다6. 카르카르 전투에서의 승리7. 길르앗 라못에서의 전사8. 그 이후9. 평가10. 창작물에 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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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다 왕 아사 제38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라 사마리아에서 22년간 다스렸다.
그런데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이스라엘의 어느 선왕{先王}보다도 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다.
열왕기상 16:29~30 ( 공동번역성서)[1]
성경의 등장인물로 북이스라엘의 7번째 왕이자, 오므리 왕조의 2번째 왕이다. 부친인 오므리 왕이 세멜에게 사마리아를 사기 전에 태어났으므로 디르사 출생.

2. 왕위에 오르다

선대 왕이었던 오므리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위에 올랐으며, 아내는 페니키아(개역한글판 기준으로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 열왕기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이스라엘 왕이며, 동시에 구약 내내 가장 비중있게 까이는 북이스라엘 왕이기도 하다. 실제로 열왕기상 중반부 이후부터는 아합과 엘리야의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열왕기상 16장 28절에 최초로 등장하면서[2]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이라며 아내인 이세벨과 세트로 까이는 왕이지만,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부왕인 오므리의 뒤를 이어 막장이었던 북이스라엘을 안정시키는 데 공을 들인 유능한 군주이기도 했다.

성경의 내용만 봐서는 이게 무슨 말인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부왕인 오므리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까지만 해도 북이스라엘 왕가는 2대 이상을 넘어간 일이 없었다.[3] 조금만 힘 좀 쓴다 싶으면 곧바로 왕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왕을 해먹던 막장이 바로 이 시절이었고, 이 왕좌의 게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인물이 바로 아합의 부친인 오므리였다. 그리고 오므리는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천도한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왕권과 내치를 굳건히 하였으며,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 역시 이 당시에 이뤄진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이 당시 북이스라엘은 오므리의 집(아카드어: 𒂍𒄷𒌝𒊑𒄿 Bit-Humri )이라는 별호로 불릴 정도로 그의 치세가 한 왕조의 창업 군주로서 성공적이라는 걸 유추할 수 있는 기록도 남아있다. 거기다가 오므리는 재위기간이 고작 9년 남짓이다. 심지어 치세의 절반 가까이를 경쟁자와의 내전으로 보내야 했다. 반면 여로보암 1세나 바아사는 여러모로 사정이 나았는데 둘 다 재위기간이 20년이 넘고 유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만 빼면 내적으로 특별한 문제점이 나타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오므리의 왕가는 2대를 넘는데 성공했고 둘은 실패했으니 오므리가 창업군주로서는 성공한 셈이다.

아합은 이러한 부친의 정책을 계승하여 북이스라엘을 최대한 안정화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종교집단, 즉 예언자(선지자)들의 대한 견제로 시돈(페니키아)의 공주이자 아내 이세벨에게 종교 권한을 일임하여 바알(멜카르트) 숭배를 추진했다. 이는 과거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 1세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금송아지 숭배를 추진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추정된다.

이는 성경에서 그대로 언급한 내용이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열왕기상 16:31~33 (개역개정)

요약하자면 선왕인 오므리가 금송아지를 섬겼다는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왕이 되자마자 부친의 행위를 따라한 것 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았고 이걸 더욱 심화시켜 바알(멜카르트) 숭배를 추진하면서 그 신전 앞에 아세라 목상까지 만들어 결국 하나님을 격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적대관계였던 남유다도 압도적인 국력을 바탕으로 사실상 속국화했고 딸 아달리야를 시집보내 결혼 동맹을 맺었다. 또한 아람, 남유다, 에돔, 모압 등 주변국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막 레반트 지방으로 팽창해오던 아시리아를 막아내기 위한 동맹체제를 구축했고, 기원전 853년 시리아에서 벌어진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시리아 왕 살마네셰르 3세가 친정한 6만 군사를 30개국 연합군 3만 5천 명의 군사로 격파,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출을 한 세기 늦추는 큰 공훈을 세웠다. 참조

하지만 바알 숭배 추진 때문에 아합은 당대 예언자들의 대표인 디셉 사람 엘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에겐 악의 축과도 같은 인물이었고, 이들이 아합의 업적은 빼고 악행만 써서 남긴 글의 내용이 후세의 가장 거대한 종교 경전으로 전해지는 바람에 후세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내용을 빼고 볼때 아합을 재평가 할 여지가 있느냐면 물론 그것도 아니다. 어차피 나봇을 필두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옥에 가두고 재산을 빼앗는 등 잘못된 행위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선한 왕은 아니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애초에 우상 숭배의 죄로 가뭄이 올 걸 들었으면서도 아무런 대책을 안 세워놓은 걸 보면 백성들의 반응이 어땠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3. 엘리야와의 대결

여기서부터는 대부분 구약성경 열왕기상에서 발췌된 부분이다.

아합 왕의 바알 숭배를 두고 디셉 사람 엘리야는 왕의 앞에 나아가 가뭄이 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길르앗의 티스베에 살고 있던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비는 물론 이슬도 한 방울 이 땅에 내리지 않을 것이오."
열왕기상 17:1 (공동번역성서)

이에 아합과 이세벨은 들은 척도 안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자 오히려 이세벨은 '이게 다 저 놈이 바알을 노하게 해서 그런 거다!'라며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하였다(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세벨은 야훼의 선지자(예언자)들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했다). 결국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마수를 피해 숨어 사는 처지가 되었다.

가뭄이 지속되자, 아합은 궁내대신 오바드야(오바댜)[4]와 함께 말을 먹일 풀을 찾아 궁을 나섰는데, 마침 아합과 따로 움직이던 오바드야가 엘리야를 만났다. 오바드야는 엘리야에게 필시 왕이 댁을 죽이려고 길길이 날뛸 테니 빨리 도망가라고 말했지만, 엘리야는 걱정 말고 아합을 나에게 데려오라고 했으며, 아합은 오바드야가 예상한 대로 길길이 뛰며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했다.

엘리야 앞에 행차한 아합은 " 네놈이 저주를 내려 이스라엘을 파탄나게 한 흑막이로구나!"라며 독설을 퍼부었으나, 오히려 엘리야는 비범하게도 "이스라엘을 파탄낸 원흉은 소인이 아니옵니다! 이방 신을 섬긴 폐하와 왕실이오!"라며 크게 일갈하고는 왕비 이세벨 휘하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이슈타르)를 섬기는 사제들과 가르멜(갈멜) 산에서 한 판 붙자고 대결을 제의했다. 이에 대해서는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 문서도 참조.

경합 방식은 각자의 제단에 각을 뜬[5] 송아지를 놓고 먼저 불이 붙는 쪽이 승리하는 것이었는데, 첫 턴은 숫자가 많은 바알의 사제들이 하기로 했다. 사제들이 한아름 댄스를 추면서 그들의 신인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반나절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호기롭게 지켜보던 엘리야는 "이야, 욕본다. 바알 신께 좀 더 크게 부르짖어야 오실 게야. 바알 신께서 자네들을 돌봐주시느라 피곤하셔서 주무시고 계신가 보지. 아니면 잠시 다른 신전에 마실을 나가셨든가, 이 나라의 상황을 보고 걱정하시느라 못오시는 것 같구만. 어서 너네 신 깨워드려 보셔?"라고 사제들을 대놓고 바보 취급하였는데,[6] 그 때문에 오기가 생겼는지 아예 각종 흉기로 자신들의 몸을 자해하면서[7] 더 큰 소리로 허공에 외쳤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효과는 전혀 없었다.

이윽고 엘리야의 차례가 왔다. 엘리야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돌로 무너진 야훼의 제단을 세우고 제단 주위에 약 15L 용량의 도랑을 만들었다. 그리고 난 후에 사람을 시켜 통 넷에 물을 채워 제물 위에 세 번 부으라고 했더니, 물이 제단에 흐르고 도랑에 물이 가득 찼다. 마침내 저녁 제사 드릴 시간이 되자 그는 나아가서 기도를 드렸다. 제단에 부은 물 때문에 불이 도저히 붙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야가 기도를 드리자 단번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과 돌을 불태우고 제단과 도랑의 물까지 모조리 증발시켜 버렸다.[8] 그러자 이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보고 엎드려 야훼를 하나님으로 찬양했다. 이 대결에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아합 왕은 크게 놀랐는지 직후 엘리야가 군중들을 동원해 바알의 사제들을 모조리 도륙내는 광경을 보면서도 말 한마디도 못하고 있다가 엘리야가 다독이자 그제서야 돌아갈 정도의 추태를 보였다. 그 후 엘리야는 큰 비가 내릴 것을 예언하고, 아합은 마차를 타고 이스라엘로 돌아갔다. 이를 기념하여 현재 갈멜 산에는 엘리야가 불칼을 들고 바알의 제사장을 도륙하는 석상이 세워져 있다.

이렇게 남편인 아합이 제대로 이미지를 구겨버리자 분노한 이세벨은 어떻게든 엘리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이스라엘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엘리야는 더욱 더 깊이 숨어버렸다. 덕분에 아합은 잠시 구겼던 자존심을 어느 정도 되찾았는지 다시 이세벨에게 종교 활동을 위임하고 기존의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고고학자들은 이때의 바알 신이 고대 가나안에서부터 숭배되던 바알-하다드 신이 아니라 페니키아의 바알-멜카르트 신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세벨은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당시 페니키아는 바알-멜카르트와 아세라 같은 메소포타미아 계통의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고, 이세벨이 오므리 왕가에 시집오면서 북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외래 종교인 페니키아의 종교를 도입하여, 예언자들이 반발했다는 것.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고대 가나안에서 농경의 신으로 숭배되던 바알-하다드 신은 이 시대까지도 시골에서 야훼 신앙과 함께 숭배되었다고 추정되는데, 열왕기서가 후대에 쓰여진 것을 생각한다면 후대 성경 필경사들이 구별을 못하고 하나로 묶어서 서술했을 수도 있다.

또 아합 왕이 이세벨에 비해 성경에서 긍정적으로 서술된 부분도 없지 않고, 아합 왕이 페니키아의 신들을 믿는 것을 지원해주기는 했어도 야훼 숭배자들을 몰살시키려 한 적은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당시 아합 왕은 단순히 야훼 믿을 사람은 야훼 믿고, 페니키아 신들을 믿을 사람은 페니키아 신들을 믿으라는 의미에서 새로 신전을 지어 준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하느님이 땅을 메마르게 한다고 하자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바알 예언자들과 엘리야의 대결 조건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냥 아합 왕은 페니키아의 공주인 이세벨의 눈치를 봐서 이교도들의 편의를 봐주려다가 선지자들의 속을 긁어버려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

엘리야를 잡아 족치려 하기도 했지만[9] 엘리야를 만났을 당시 죽이기 전에 일단 상황부터 따져봤고, 엘리야가 해결 방안이 있다고 하자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엘리야가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힘을 보이자 그를 손대기 꺼리기도 했다(실제로 엘리야의 목숨을 노린 건 주로 이세벨이었다). 이 때문에 고고학자들 중에서는 성경 내용과 달리 아합 왕 본인은 야훼 신을 숭배하는 사람이었지만 외국 공주였던 이세벨의 신앙을 존중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하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아합은 이세벨과는 달리 엘리야를 두려워하는 묘사가 많은데 이 역시도 야훼 신앙을 무시하지 않는 이상은 할 수 없는 행위다. 당장에 야훼 신앙을 적극적으로 탄압한 이세벨은 야훼의 선지자들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마구잡이로 죽였다.

참고로 이렇게 엘리야에게 크게 데여서인지 하술할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 엘리야가 나타나자 '원수'라고 부르면서 또 찾아온거냐며 학을 떼는 모습을 보였다.

4. 아람과의 전쟁

아람-다마스쿠스 왕 벤하닷[10] 2세 하다드제르[11]가 휘하의 32명의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아합에게 ‘네 재산과 아내들과 예쁜 딸들 다 내놔!’라고 강요하자, 아합은 다 들어줄 테니 군대를 물리라고 요청했다. 예상보다 쉽게 아합이 굴복하자, 벤하닷은 한술 더 떠서 ‘나한테 들어주는 거 내 부하들한테도 똑같이 해야 하는데?’라고 요구 조건의 강도를 더 높이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러자 아합은 신하들을 불러모아 '얘네들이 지금 우릴 다 벗겨 먹겠다는데 어쩌지?'라고 물었고 신하들은 꼭지가 돌아 죽기 살기로 싸우자고 외쳤다.

아합 역시 마찬가지로 화가 단단히 났던지라 곧바로 벤하닷에게 ‘오냐 한 판 붙자!’라며 최후통첩을 날렸고,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벤하닷은 오늘은 한 탕 마시고 내일 저것들 다 쓸어버리자며 부하들과 거하게 술판을 벌이다가 아합이 조직한 특수부대의 야습[12]에 제대로 걸려서 떡이 되어 측근들과 함께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갔다.

한편 전쟁에서 승리한 아합은 저들이 다시 쳐들어 올 것이 뻔하니 대비하라는 야훼의 예언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군을 재정비하였다. 이윽고 정말로 도망쳤던 벤하닷이 전력을 끌어모아 아벡 평원으로 진군해 왔는데, 당시 아람인들은 벤하닷에게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은 산의 신[13]이니 산에서 싸우면 우리가 불리하지만 평지에서 싸우면 우리가 저것들을 밟아 버릴 수 있다며 평지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낸 아합의 북이스라엘군은 아벡에서 아람 보병 10만을 몰살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고[14] 벤하닷은 측근들과 골방에서 덜덜 떠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 벤하닷은 아합 앞에 엎드려서, 빼앗은 영토를 모조리 뱉어내고 다마스쿠스(다메섹)에 아합 왕의 이름을 딴 고속도로를 까는 조건으로 살려달라며 항복했고, 이를 수락한 아합은 벤하닷을 살려서 돌려보내 주었다.

그러나 이런 아합의 결정은 예언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는데, 한 예언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부상당한 병사로 변장[15]하고 아합이 지나갈 때 그를 불러 세워서 ‘내가 전장에서 포로를 대신 맡고 있었소. 그런데 제대로 못 지키면 내가 목숨을 바치든가 은 달란트를 바쳐야 하는데 내가 볼일 보는 사이 놓쳐버렸는데 어떡합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아합이 네가 놓쳤으니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대답하자마자, 예언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아합 당신도 하느님께서 맡긴 벤하닷 목숨을 놓쳤으니 당신 목숨으로 대신해야 할 것이라고 쓴소리를 퍼부었다.

얼핏 보면 적당히 전쟁을 정리한[16] 아합의 결정을 우유부단하다면서 까는 예언자가 전쟁광스러워 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 벤하닷은 약속과 달리 빼앗은 영토들을 내놓지 않고 버텼기에 결국 아합은 직접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시리아와 다시 전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그 전쟁에서 정말 자신의 목숨으로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하고 말았다.[17]

5.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다

시리아와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후, 아합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그가 가진 포도원을 자신에게 팔라고 제안하면서 원한다면 더 좋은 포도원을 주고 돈도 달라는 대로 다 주겠다며 후한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포도원 주인인 나봇은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는 것을 하느님께서 금하실 것이라 하여 거절했다.[18] 그러나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은 그저 심통만 났던지, 침대에 틀어박혀서 식사조차 하지 않고 앓아누웠다.

이걸 본 이세벨이 뭔 일 있냐고 남편에게 묻자, 아합은 나봇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이세벨은 아합을 위로하며 나봇의 포도원을 선물로 드리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세벨은 곧바로 나봇이 사는 지역의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재판을 통해 나봇을 죽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귀족들은 그 지시에 따라 백성들을 불러 모아놓고 나봇을 세워 재판을 벌였는데, 죄목은 하느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것. 장로와 귀족들은 이세벨의 지시를 받고 불량배 2명을 증인으로 세워 거짓 증언을 하게 했다. 결국 나봇은 군중들에게 붙잡혀 돌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죄인의 재산은 즉각 왕에게 귀속되는 법에 따라 결과적으로 나봇의 포도원 역시 아합에게로 넘어갔다.

아합은 희희낙락하면서 나봇의 포도원을 보러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숙적이나 다름없던 예언자 엘리야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아합에게 '너와 아내 이세벨은 개에게 먹힐 것이고 네 집안은 망해 없어질 것이다!'이라고 예언하자 아합은 내가 한 게 아니고 다 이세벨이 시켜서 한 거라며 싹싹 빌었고,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엘리야도 한 발 물러나 재앙이 "너의 아들 대에 재앙이 찾아올 것"이라면서 집행유예 예언을 했다.[19]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열왕기상 21:17 (개역개정)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열왕기상 21:19 (개역개정)

6. 카르카르 전투에서의 승리

아합 재위 말년인 기원전 853년, 신 아시리아 제국의 살만에세르 3세와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아합이 맹주가 되어 남유다, 아람 그 외 몇몇 나라들과 연합하여[20] 전투를 벌여 아시리아를 막아냈다. 이때 아합의 활약이 대단했던지 아시리아 측 기록에는 가장 무서운 적 중 하나였다고 되어 있고 그의 밑에 1만 명의 보병과 2,000대의 병거가 있었다고 한다.[21] 카르카르에서 벌어진 이 전투를 카르카르 전투라 부르며 이 전투의 의의는 대단히 커서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출을 늦추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는다.[22] 그러나 오므리-아합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이 된 예후가 아시리아를 끌어들인데다가 예후 왕조 시기 툭하면 아람과 치고받고 싸워 두 나라가 모두 약해진 바람에 기껏 늦춰졌던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출은 앞당겨지고 만다.

이 전투는 열왕기에는 기록이 없으며 1861년 터키 중부의 쿠르크(Kurkh)에서 발견된 비문에 기록되어 대영 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 비문은 쐐기문자로 기록되있다. 이 중 아합에 관한 부분을 알파벳으로 표기해보면 "A-ha-ab-bu Sir-ila-a-a"이 된다. 정설은 "이스라엘의 아합"을 표기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해당 부분이 이스라엘 왕 아합이 아닌 다른 인물을 표기한 것이다는 소수의견도 존재한다.

7. 길르앗 라못에서의 전사

시리아(아람)와의 전쟁 이후 3년 뒤, 여전히 시리아가 영토를 돌려주지 않자 마침 친선 차 방문했던 유다 왕 여호사밧[23]과 함께 공동 전선을 펴서 길르앗 라못[24]을 침공할 계획을 짰다. 이때 여호사밧은 선지자들의 조언을 한 번 들어보자고 아합에게 조언했는데 아합은 예언자 4백 명을 불러 모아다가 길르앗 라못에 대한 침공 여부를 물었다. 결과는 예언자 400명 전원 찬성.

하지만 뭔가 미심쩍었던 여호사밧이[25] 혹시 결석한 예언자는 없냐고 아합에게 묻자, 아합은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걔는 나한테 툭하면 부정적인 말만 골라서 하는 인간이라[26] 일부러 뺐다고 실토한다. 여호사밧은 그런 말 말고 말 나온 김에 미가야한테도 한번 조언을 들어보자며 그를 불렀다. 이렇게 해서 찾아온 미가야는 처음엔 심드렁하게 400명의 예언자와 같은 소리를 했지만[27] 제대로 말하라는 아합의 다그침에 그곳에 가면 죽을 것이고, 선지자들이 왕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면서 아합과 그 자리에 모인 다른 선지자들까지 전부 싸잡아 디스하였다.[28] 그러자 예언자 중 한 명인 시드기야는 화를 내며 하느님의 영이 언제 날 떠나서 너한테 갔느냐며 미가야의 뺨을 쳤고, 미가야는 짧게 네가 골방에 처박혀 덜덜 떨며 숨어지내게 되는 그날 알게 될 거라고 응수했다.[29] 아합은 미가야를 끌고 가 내가 승전보를 울리며 돌아올 때까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둬놓고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물과 음식을 주라고 명령을 내린 뒤 여호사밧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미가야는 끌려가기 직전에 아합에게 그대가 살아 돌아올 거라면 하느님이 이런 예언을 내게 주셨겠냐며 확인사살을 했다.

전투에 들어가기 앞서,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선지자인 미가야의 예언인데 뒤가 좀 켕기긴 했는지(…)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자신은 변장하고 참가한다고 말해놓은 뒤 자신은 마부로 변장하여 전투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적들이 여호사밧을 이스라엘 왕이라 생각하고 공격했다가 ‘어, 얘는 이스라엘 왕이 아니네?’하며 몇 번 착각을 일으켰고 정작 변장한 아합은 몰라보았다. 이때 여호사밧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되었다.[30] 그런데 전투 도중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 하나가 아합의 어깻죽지를 뚫었고, 아합은 눈 먼 화살에 맞은 채로 아람인들과 싸우다가 이날 저녁에 전사하는데,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병거 바닥에 고일 정도였다고 한다. 운 나쁘게도 화살이 갑옷 솔기에 맞았고,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면 살았을 것을 하필 난전으로 인해 전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바람이 과다 출혈로 죽고 만 것이다.

아합의 시신은 사마리아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그가 타고 있던 병거는 사마리아 연못에서 씻겨졌는데 이때 병거에서 흘러나온 그의 피를 개들이 핥았다. 게다가 그 연못은 이전부터 창녀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다. 이는 위에 적힌 나봇의 포도원 강탈 사건 직후 엘리야가 아합에게 내린 저주가 실현된 것이라고 한다.

덤으로 여호사밧도 이 패전에서 군사력을 모조리, 그것도 초대형 스케일로 날려먹었고 그 이후 유다는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물론 역대기의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는 절반만 날려먹었지만 그 다음 아들 대에 에돔의 반란 때문에 나머지 절반을 날려먹었다(...). 이후 중흥기가 여러 번 왔지만 이때만큼의 국력을 유다는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이집트와 아시리아, 그리고 신바빌로니아에게 휘둘리다 결국 멸망한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남유다 왕국이 사실상 북이스라엘 왕국의 속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성서에서 대등한 동맹관계처럼 묘사된 것과 달리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복종해야 하는 제후였고, 아합이 군사를 보내라고 해서 군사를 이끌고 갔다는 것.

8. 그 이후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가 오므리 왕조의 3대 왕으로 즉위했는데, 이 녀석은 뭔가 제대로 한 일도 없이 옥상에서 떨어져(...) 끙끙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동생 여호람이 다음 왕으로 즉위했다. 한편 영원한 숙적 엘리야는 수제자인 엘리사의 앞에서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했고, 이후 엘리사는 장군 예후를 사주하여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남유다 왕 아하시야[31]를 비롯한 이세벨과 오므리 왕가를 모조리 도륙낸다. 이후 아합의 딸인 아달리야가 남유다의 왕위를 찬탈하여 여왕 노릇을 하지만 6년 만에 쫓겨나 살해당한다. 그러나 남유다의 새로운 왕인 요아스가 아달리야의 외손자였던 관계로 남유다에서 아합의 핏줄이 모계로나마 이어지게 된다.

9. 평가

성격 문제나 신앙 문제는 차치하고서 단순히 한 나라의 군주로서의 치적만 놓고 본다면 유능한 편이다.

아합은 건국 이래 내란과 반역이 끊이지 않았던 북이스라엘 왕국 역사를 통틀어 안정된 치세와 강력한 왕권을 누린 얼마 안 되는 군주 가운데 하나였다. 외교적으로는 북쪽의 페니키아와 남쪽의 유다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어 국제관계를 안정시키고 무역으로 왕국의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나중에 예후가 오므리 왕가를 도륙하는 과정에서 이 동맹관계는 자동 파기된다.

군사적으로는 오므리가 복속시킨 모압에 대한 지배를 계속 이어나가는 동시에 시리아(아람)와 아시리아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아합 통치기까지 북이스라엘에 복속되어 있던 모압은 아합 사후 그의 아들인 요람 왕 시기에 이스라엘에게서 독립하고 이웃 왕국인 에돔은 여호사밧 통치기까지 남유다에 복속되어 있다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시기에 반기를 들어 역시 독립한다.

성경에서도 선지자 탄압은 시돈의 공주 이세벨이 주도했고 오히려 아합은 엘리야와 토속신앙을 두려워했다는 묘사가 있다. 거기다가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보듯 엘리야를 위시한 야훼의 선지자들을 완전히 무시하지만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세벨을 말리지는 못했지만 당시 지중해 서아시아 뉴욕으로 불릴 정도의 엄청난 부를 소유한 시돈의 공주를 막 대했다가는 국제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공처가 기질은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신학자들도 부유한 나라인 시돈 공주라서 마음대로 못 했다고 여길 정도.

여자를 많이 밝혀서 자식과 손자가 70명이라는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훗날 자식 중 아들 아하시야와 요람(여호람)은 북이스라엘 왕, 외손자인 아하시야는 남유다 왕, 딸 아달리야는 남유다 여왕이 되었다. 다만 나중에 이 후손들은 북이스라엘 장군 예후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죄다...

또한 성경에는 오므리 왕조를 '아합의 가문' 이라고 칭하는데 그만큼 아합이 오므리 왕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오므리 왕조에서 가장 기록이 많이 남아있고 재위기간도 길었던 왕은 아합으로 실제로도 44년간 유지된 오므리 왕조의 거의 절반인 21년이 아합의 치세이다. 이러니 성경에서 오므리 왕조를 '아합의 가문'이라 칭해도 딱히 이상할 게 없다. 더욱이 그의 딸은 아예 유다 왕국의 왕비였으니...

참고로 이세벨 왕후는 카르타고를 건설한 디도 여왕의 왕고모라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일이 사실이라면 쩨쩨한 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좀 심하게... 게다가 구약성경에는 다른 일도 아닌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일이 오므리 왕조의 파멸의 계기였다고 하니 당대든 후대[32]든 좋지 않게 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게다가 저 짓을 해놓고 아내 탓을 했다고 하니[33] 이 부분은 영 왕답지 않은 면이다.

여담으로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아합은 사실상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공처가 왕이 된다(...). 그 다음은 아마도 남유다의 여호람 왕.[34]

랍비들의 문학에서는 역시 성경과 다를 거 없이 사악한 왕, 우상숭배자 등으로 묘사되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는 선행을 해서 죄를 조금 용서받았거나 므낫세처럼 회개를 했다고도 하며 오히려 아하스를 더 깐다. 랍비 문학에서 아하스는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회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10. 창작물에 준 영향

모비 딕의 등장인물인 에이허브 선장의 이름은 이 사람에게서 따왔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성서의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지만 아합의 경우 악역 포지션이기 때문에 이 인물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작중에서 에이허브 선장의 부모가 이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다. 에이허브 선장의 아버지는 고래잡이 사냥꾼이었는데 바다에서 사고로 작고했고 에이허브 선장을 잉태했던 어머니가 슬픔과 좌절로 미쳐버리는 바람에 태어날 그에게 붙인 이름이다.[35] 그리고 어머니 역시 산고로 사망했다. 에이허브 선장이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도 있다.

메탈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의 주인공 빅보스( 베놈 스네이크)가 전작에서의 사건 이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병원에서 깨어난 직후 의사에게서 받는 가명이 에이허브인데, 이는 아합의 영어명이다. 물론 역사속의 아합에서 따온 것은 아니고, 모비 딕의 에이허브에게서 따온 것이다.

폴아웃 4의 DLC Automatron의 중간보스 포지션인 센트리봇 AHAB이 아합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는데, 아합의 부인이던 이세벨에게서 유래된 지제벨의 뒤에 AHAB이 마치 왕처럼 떡하니 서있다. 여담으로 성경에서 무지하게 까이는 아합이 실제로는 나름 유능한 왕이었던 것처럼, AHAB도 평범한 오브젝트나 장식품같아 보이지만 실제론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1] 여담으로 열왕기상은 아합의 죽음으로 끝난다. [2] 여로보암 1세 이후의 왕들 중 바알을 숭배하거나 암군이었던 왕들은 재위 기간이 1달에 불과했던 살룸과 그나마 덜 악했다고 이야기된 호세아를 뺀 모두가 앞에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라는 말이 붙었는데, 아합의 경우에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걸었던 죄의 길을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었다 = 여로보암보다 더했다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3] 그리고 이 추세는 예후 왕가 이후 다시 시작되어, 4대를 지속한 오므리 왕조와 5대를 지속한 예후 왕조 외에 2대 이상을 넘긴 북이스라엘 왕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오므리의 전대였던 시므리는 즉위 7일만에 오므리에게 살해당한 왕이었다. [4] 이제벨(이세벨)이 아합을 부추겨 예언자들을 학살할 때 그중 100명을 빼내 동굴에 숨기고 의식주를 제공해 준 인물로, 이세벨의 종교 정책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던 고위층 인사였다. [5] '토막낸다'라는 뜻이다. [6] 열왕기상 18장 27절( 공동번역성서). [7] 바알 신앙에서 사제들이 바알에게 크게 기도드리는 방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는 우가리트 신화에서 엘이 바알을 부활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에 큰 상처를 내었기 때문이다. [8] 훗날 느헤미야가 이 기적을 재현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우물에서 길어온 건 물이 아니라 나프타였다. [9] 그런데 아합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를 메마르게 해 말려 죽이겠다고 예언한 사람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0] 아람에서 쓰는 군주의 칭호다. [11] 재위기간은 BC 865~842년 [12] 이 야습에서 야훼의 예언자들 역시 어느 정도 아합 왕을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소에는 으르렁거리던 처지였지만 국가의 위기다 보니 힘을 합칠 정도의 관계는 유지하고 있던 모양. 실제로 이들 뿐만 아니라 엘리야의 수제자인 엘리사 역시 오므리 왕가를 극도로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과 아람과의 전쟁에서 북이스라엘을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했다. [13] 모세 십계명을 시나이 산에서 받았으며,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중앙 산지에 위치해 있다. [14] 여기에 추가로 전투에서 살아남아 도망치던 아람군 패잔병 중 2만 7천 명이 무너지는 아벡 성읍에 깔려 죽었다. [15] 주도면밀하게도 자기 친구더러 자기를 겁나게 패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첫 번째 친구는 거절했고 이에 선지자가 야훼의 말씀을 이행하지 않고 나를 떠난다면 사자에게 죽을 것이라 경고했으나 쿨하게 무시하고(...) 가버렸는데 결국 사자를 만나 죽었다. 2번째 친구는 선지자를 쿨하게 흠씬 두들겨 패버렸다(...).(왕상20:35~43) [16] 실제로 당시 시리아는 아시리아를 견제하고 있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리아와 전투를 벌이게 됐는데, 아시리아의 살마네셰르 3세가 남진정책을 펼치자 아합이 시리아의 벤하닷 2세 및 다른 동맹국들과 연합을 결성,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시리아의 대군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아시리아의 기록에도 이때의 패배에 대해 적장 '아하부' 때문에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아합의 역할이 컸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시리아와의 잦은 전쟁에서 야기된 국력 약화로 아시리아의 성장을 막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17] 그나마 아합에게 희소식이라면, 벤하닷의 최후도 좋지 못했다. 벤하닷은 길르앗 라못에서 이기고 요람 왕 시절까지 북이스라엘과 계속 전쟁하고 살다가 병이 들어 부하 하사엘을 시켜 엘리사에게 자기가 병이 나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는데 엘리사가 병은 낫겠지만 벤하닷은 죽을 것이라고 말을 한 데다가 그 하사엘에게 네가 다음 왕이 될 거라고 말하는 바람에 하사엘이 그 말대로 벤하닷을 베개로 질식시켜 살해하고 자기가 왕이 되었다(...). [18] 여기에는 역사적, 종교적인 배경이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당시 땅을 각 지파에게 배분하였고, 각 지파들은 또 각 사람들에게 땅을 배분해 주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소유한 토지를 하느님께서 준 약속의 땅이자 평생토록 후세에 물려줘야 할 성스러운 성지로 여겨 함부로 팔거나 양도하지 않았으며, 피치 못할 사정으로 팔았더라도 부채를 성실히 갚았다면 7년 뒤에는 땅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 이런 면에서 보면 이세벨의 개입은 야훼 신앙을 부정하는 그녀로서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남편이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것 말고도 다른 가치를 지닐 수 있으니. [19] 이후 예후가 역성혁명을 일으켰을 때 아합의 아들인 여호람 왕이 바로 그 포도원이 있던 곳에서 죽었으며, 예후는 부하에게 그 시체를 나봇의 포도원에 던지라고 명하며 야훼가 시킨 일이라 말했다. [20] 아시리아측 기록에는 열두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1] 주요 동맹국인 아람은 이보다 더 많아서 보병이 2만 명, 기병이 1,200명에 병거는 1,200대였다. 그러나 여러 세력의 연합체 성격이 이스라엘보다 강한 아람의 사정상 병력이 많아도 아합이 맹주가 되는 데는 무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22] 아시리아 측에서는 쪽팔렸는지 이겼다고 기록했지만 아합을 고평가한 점, 이겼다는 살만에세르 3세가 정작 급히 회군한 점을 미루어 보면 아시리아의 패배였을 것이다. [23] 남유다의 4대 왕으로, 야훼 신앙에 헌신적이었지만 현실주의자였던지 오므리 왕가와 잦은 친교를 맺고 군사 활동도 종종 함께 했다. 심지어 며느리로 아합의 딸을 맞아들이는데, 이 딸이 바로 훗날 남유다의 6대 왕인 아하시야의 어머니이자 훗날 자신이 여왕이 되겠다고 다윗 왕가를 몰살시키려 했던 아달리야 여왕. 참고로 아달리야는 재위 6년 만에 여호야다 사제가 주도한 혁명으로 폐위되어 칼에 맞아 죽고, 유일하게 몸을 피해 살아남았던 다윗 왕가의 핏줄 요아스가 새롭게 왕위에 등극한다. [24] 오늘날로 치면 요르단 북부에 있는 제라쉬로 추정한다. 흥미롭게도 나중에 아합 일가를 멸하는 예후가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 곳 역시도 이곳이다. [25] 얼마 전까지 왕비 이세벨의 주도로 전국의 선지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바람에 선지자들은 숨어 다니기 바빴는데, 왕의 호출로 40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이 즉각 한자리에 집합한 상황도 뭔가 이상하긴 하다. 아마도 당시 지도층의 입맛대로 사회 여론을 조성하는 어용 종교인이나 언론인 같은 집단이었을 것이다. [26] 아합이 즉위하고 나서 열성적으로 이방 신 바알을 섬기고 야훼의 예언자들을 심하게 핍박하였는데 상식적으로도 제대로 된 예언자라면 좋은 소리를 해줄 리가 없다. [27] 그도 그럴 게, 어차피 아합이 딱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싸우러 가야한다고 말을 듣든지 가지 말라고 하든지 어차피 아합은 길르앗으로 출전하기로 결심을 한 상태였고, 실제로도 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나서도 자기 뜻대로 출전을 했다. 이러니 미가야 입장에서는 굳이 바른 말을 할 필요성을 느꼈을 리 없다. [28] 여기서 미가야가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이 본 환영 중에 하느님이 천상회의를 열어 어떻게 아합을 속여 전사시키게 만들까란 주제를 놓고 회의 중에 한 영이 자신이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아합이 부른 400명의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다고 제안하자 하느님이 만족해 하며 그대로 하고 또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29] 실제로 엘리야가 바알 신자 1:450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이세벨이 어느 정도 유화 정책을 쓰고 있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상식적으로도 선지자들이란 자들이 승전할거라고 바람 다잡아서 기껏 올라갔는데, 패한 건 둘째치고 남편이 전사까지 했으니 꼭지가 안 돌아갈 리 없다. [30] 대하 18:31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 적들을 감동시켜서 여호사밧을 떠나가게 하셨다. 이때 여호사밧이 지른 소리가 아합을 구원해 달라고 야훼에게 청하는 소리인지, 적들에게 자신은 아합이 아니라고 알리는 소리인지, 아군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인지 성서학자들 사이에 아직 논쟁이 있다. 성경에서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방법은 요원하다. [31] 두 사람 모두 아합 왕과 이세벨의 혈족들이었다. 즉, 이 당시에는 사실상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오므리 왕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32] 정확히는 구약성경이 쓰여진 시점. [33] 물론 진짜로 아내인 이세벨이 한 짓이기는 하다. 아합 자신은 단지 나봇의 포도원을 먹고 싶은데 나봇이 안 파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끙끙대는 사이 이세벨이 강탈해서 준 것이기 때문, 하지만 아무리 봐도 변명거리밖에 안 된다. 어쨌든 이세벨이 준 포도원을 지가 꿀꺽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또 시돈의 공주 출신인 이세벨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겠지만. [34] 남유다의 여호람 왕은 아합의 사위다. 여호람도 공처가면 장인과 사위가 사이좋게 공처가인 셈. 다만 두 사람이 동시대에 재위한 적은 없다. 여호람은 아합 사후 5년 뒤에 즉위하기 때문. [35] 비슷한 예로 사무엘기에 등장하는 비느하스의 아내가 본 아들 이카봇의 예가 있다. 당시 부정을 저지르던 제사장이자 남편인 비느하스가 형제인 홉니와 함께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시아버지인 엘리마저 사망하고 외적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유린하던 차에 아이를 해산했는데 모든 주변환경이 무너진 상태에서 보게 된 아들이라 이름을 이카봇(이스라엘의 영광이 떠나갔다)이라는 한탄스런 이름으로 지어준 것과도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