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0:44:42

예정설

예정론에서 넘어옴
한자
라틴어 praedestinatio
네덜란드어 Predestinatie
프랑스어 Prédestination
영어 predestination

1. 개요2. 역사
2.1. 기원2.2. 종교개혁과 예정설
3. 현대 다양한 교파들의 입장4. 가톨릭의 은총논쟁5. 정교회의 구원론6. 예정설과 유아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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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간의 구원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신으로부터 은총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선택받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보는것은 기독교계의 교리이나 이에 더 나아가 구원 이전에 예정이 있었다고 보는 신학 이론이다.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이론에서 출발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이 보편적으로 이 입장을 택하고 있는데, 특히 개혁교회에서 예정설을 매우 강조한다.

구원의 시작이자 조건 은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예정설은 단순한 구원뿐만 아니라 원죄 은총 구원론에 대한 기본입장이 되기도 한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장로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의견 개진에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1]

2. 역사

2.1. 기원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등장하는 신학이론으로서, 특히 칼뱅파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신학이론이다. 그러나 방대한 세계사 내용에서 여러가지 배경 이야기들을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세계사 교과내용 덕분에 예정설이 칼뱅파가 만들어낸 작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예정론의 시조격 인물은 가톨릭에서 4대 교부로 손꼽는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매우 갼략하게 보면, 그는 펠라기우스에 대항하여 구원에 있어서 하느님의 '선택'과 '은총'을 강조하였다.[2] 아우구스티누스가 말년에도 예정설을 고수했는지 포기했는지는 천주교 개신교 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고 영어 위키는 말한다.

펠라기우스는 이러한 주장에 반발했다. 철저한 금욕주의와 도덕주의를 주장하는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신도들의 도덕성 회복 노력에 찬물을 끼얻고 숙명론에 물들게 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펠라기우스의 인간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구원론에 반대하고, 원죄란 첫 인간 아담이 하느님을 거역한 것을 그의 후손들이 모방한 것이라 하였고 구원이란 인간은 인간이 된 하느님인 예수를 자유의지로 모방함이라 하였다.

하지만 카르타고 지역 공의회 이후 이단으로 선고되고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섞어 보려는 절충안들 또한 이단으로 선고받았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자유의지 은총에 대한 성서해석은 가톨릭의 공식적인 교리 해석이 되었다.

예정설은 이처럼 원죄론, 자유의지 논쟁, 은총에 대한 이론 등과 연관이 밀접하며, 위에서 언급한 논쟁을 거쳐 기독교 신학 안에 정론으로 자리 잡았다.

2.2. 종교개혁과 예정설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리한 교리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에서부터였다. 중세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에서 은총에는 주목했으나, 선택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 이전부터 스콜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기존의 스콜라 철학의 방법론에 반대한 새로운길 노선과 근대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학자들에 의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용되면서 기존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옛길에 대해 지나치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긍정했다는 비판이 나왔고 14세기 후기 아우구스티누스 학파들이 이주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잉글랜드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브래드워딘과 그의 영향을 받은 존 위클리프와 그를 따르는 롤라드파 무리는 예정설을 강조했다. 그리고 200여년 후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강조한 '믿음으로부터 의로움을 칭함 받는다'( 이신칭의), 또는 의로움을 인정받는다는 노선, 즉 구원에서의 은총의 역할을 가장 강조한 로마서가 루터를 비롯한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각광받으면서 예정설이 다시 강하게 주목받았다. 또한 더 이상 가톨릭 교회에서 강조하는 선한 행위들이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한 개신교 신학자들은 믿음, 은총과의 관계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정리한 예정설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었던 마르틴 루터 입장에서 기존 중세시절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 은총론을 정리하면 대략 이와 같다.
원죄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자유의지는 죄에 물들지 않았고,
스스로 이성과 자유의지로 인간이 신을 찾으려는 행동을 하면 그 보답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
출처: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 알리스터 맥그래스)

루터의 신학은 이를 반박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취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내세웠다. 스콜라식 구원관은 행위구원론으로 비판받을 것을 의식하여 인간의 노력은 별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이 마치 납동전을 금은 재화로 바꿔주듯이 인간의 보잘것 없는 행위를 구원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보상으로 준다는 예시를 곁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스콜라식 구원론은 앞서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와 오컴의 윌리엄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길(via moderna) 학파에게 큰 비판을 받았고, 16세기 마르틴 루터에 이르러 종교개혁당시 면죄부나 성유물 고행 수도행위 성지순례등 교회에서 인정하는 선행이 큰 부작용을 끼쳤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스콜라식 구원론이 교회를 망쳤다고 보았고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은 인간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마르틴 루터의 인간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사상에 매우 철저히 입각해 '원죄로 타락한 인간은 완벽하게 타락했기에 선을 실천할 능력은 없으며, 타락 이후에는 강렬한 자기만족 욕구와 자기중심주의 공로만을 추구한다고 논증했다. 루터는 스콜라 철학의 은총론은 아우구스티누스 시기 도나투스파와 펠라기우스의 주장인 공로주의로 변질 되었다고 비판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같은점이라면 인간에게 자유의지 있으나 자유의지는 악으로 향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둘의 다른점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는 선과 악 중에 악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었다는 것이고 루터는 자유의지는 완전히 악으로 타락하였다인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약간이라도 선한면이 있다고 본점이 다르다.

한때의 루터의 지지자이며 옹호자였던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 당시 개혁진영과 기존 가톨릭 교회 양쪽의 비판과 압력에도 중립을 지켰는데 결국 가톨릭 교회의 압박에 의해 루터에 반박하는 글을 쓰며, 남긴 저서는 자신과 루터의 견해와 큰 차이점이었던 <자유의지론> 이었다.[3] 루터와의 신학적 차이인 자유의지론에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제를 딴 제목인[4]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이란 책을 써서 반박했을 정도였다. 루터는 노예의지론에서 후대 신학자들과 달리 이중예정의 견해를 폈다.[5]

그러나 비슷한 시기 독일농민전쟁이 발발하여 루터는 예정설에 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펴기 어려웠다. 농민들을 이끈[6] 토마스 뮌처가 산상수훈을 근거로 고난 받는 백성이 선택받은 백성이다라고[7] 설교하여 민란이 독일 남부를 휩쓸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받으나, 고난받는 백성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며,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는 그분만이 아신다"라며 농민반란군의 과격한 선민의식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가 내세운 이신칭의는 동시대 개신교 신학자 필리프 멜란히톤 마르틴 부처에 영향을 주어 각자 독창적인 칭의론 연구에 영감을 주었고 필연적으로 예정과 소명의 개념을 동반했기 때문에 종교개혁 시작부터 예정설 논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 세대 후 장 칼뱅은 선배학자들의 연구를 집대성하고 독자적으로 논리적 신학적으로 정리하여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께서 미리 창세 전부터 구원받을 영혼과 그렇지 못한 영혼을 미리 예정하고 믿는 사람들은 선택된 자들이며, 반대로 믿지 않는(혹은 믿지 '못하는')자들은 유기된 자들이라는 이른바 이중예정(Double-Predestination)을 주장하였다.[8]

가장 강력한 근거는 역시 로마서, 그 중에서도 ' 에사오'와 ' 야곱'의 비유와 토기장이의 비유를 든다. 즉, 에사오와 야곱 중 이유없이 에사오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였으며 토기장이가 그릇을 자신의 마음대로 만들고 그릇은 결코 거기에 반박을 제기할 수 없는 만큼 구원 역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불린 사람들이며, 나아가서는 이 사람들은 결코 구원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라는 개신교 교리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 외에도 요한복음 6:37~44, 에베소서 1:4~6, 테살로니카 전서 2:13, 잠언 16:4 등, 꼭 로마서에만 등장하는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루터 사후 순수 루터파 신학자[9]들은 이러한 이중 예정론을 반대했는데 "하나님은 저주를 예정하지 않으셨다"는 것.

3. 현대 다양한 교파들의 입장

가톨릭과 개신교 양자 모두 아우구스티누스적 입장들이 많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익히 알려져 있듯이 예정론은 단순히 칼뱅이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기존에 교회에 믿고 있던 은총구원론을 좀 더 다른 각도로 이해한 것이었다.

가톨릭 입장에서는 구원은 은총으로 이뤄지며 은총은 값 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교회의 7성사 역시 유효한 사제가 한다면 사제의 성덕 혹은 받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상관없이 그 성사가 주는 은총은 유효하다고 가르치는 것 역시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교리를 잘 설명하고 있다. 다만 오로지 믿음만으로 은총을 받는건 아니라것 역시 강조한다. 2006년 루터교회, 감리회와 '의화일치선언'까지 했다.(그러나 모든 루터회와 감리회 교파들이 이 선언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예정설은 은총이 절대적인 신의 주권 하에 있으며 그 은총이 값 없이 주어지며 인간의 행위나 교만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예정설은 현재 루터파와 칼뱅파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성만찬 논쟁도 있었지만 종교개혁시기만큼 격렬한 논쟁은 아니며 루터파에서도 절충적의견에 공감하는 입장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중예정과 관련된 논쟁은 종교개혁시기는 물론 현대에 까지 개신교 신학에서 아직도 활발한 주제이다.

개혁주의 신학계 내에서도 선악과 사건을 기준으로 '타락전 예정'(supralapsarianism)이 맞느냐 '타락후 예정'(infralapsarianism)이 맞느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전자는 베자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고 하나님이 처음부터 구원받을 자와 유기될 자를 모두 대칭적으로 예정해 놓은것은 물론,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까지도 예정되었다는 입장이다. 반대로 후자는 불링거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들을 예정한 것은 확실하나 유기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비대칭적 예정이며, 선악과 사건도 본래 하나님의 예정엔 없었다는 입장이다.

웨슬리안은 선택과 유기의 칼빈주의 이중예정을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담의 죄로 인간의 행위의지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데에는 동의하나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인 사랑과 양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할 수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소망할 자를 예지하신다고 보았다. 이것을 예지예정[10]이라고 말하며 이른바 예지예정을 받아들이는 웨슬리안 교단으로 감리회, 성결교회, 하나님의 성회 가 있다.

한편 예정론이 개신교인들에게 선민사상을 가져다준다는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하여 일부 개신교인들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의하여 선택 받는 것이니 만큼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다면 선민사상에 빠질 수 없다고 주장하나 예정론을 기반으로 둔 서방교회에서 선민 사상은 일상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기 때문에 예정론은 도덕적으로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정론을 버린다고 선민사상도 없어질지는 회의적이다. 이 경우 구원을 선행 같은 인간의 노력으로 받기 때문에 비기독교인이나 기독교인이라도 죄를 짓는 사람을 노력이 부족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예정론에서 나오는 선민사상은 애교로 보일 정도의 위험한 다른 선민사상을 부추길 수 있다.

4. 가톨릭의 은총논쟁

사실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관심 대상은 비슷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 역시도 개신교의 예정설 논쟁과 비슷한 논쟁이 있어왔다. 이를 은총논쟁이라 한다.

전술했다시피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리기우스의 행위 구원론을 디스했다. 이 후 이 논쟁은 잠잠해지는 듯 했으나 중세에 다시 논쟁이 불붙었다. 우선 베네딕토회의 고트샬크(Gottschalk of Orbais)는 극단적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주장하다가 라바노 마우로(Rabanus Maurus)의 비판을 받았고, 아벨라르도(Aberlardus)가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를 고집하다 베르나르도의 비난을 받았다.

또한 사실 이중예정은 이미 가톨릭에서 9세기 마인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포된 것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848년에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를 연구하던 신학자 고트샬크(Gottschalk; 810?~869)가 예정에 대해 쓴 글이 그의 전 수도원장 라바누스 마우루스를 격분하게 했고, 이로 인해 이단으로 판명되어 초주검이 되도록 매질을 당했다. 그 이후에 그는 오빌레르 수도원에 감금당했으며 그는 그곳에서 정신착란을 일으켜 868년에 죽을 때까지 풀려나오지 못했다.(출처 『기사도의 시대』 中) 또한, 로마서의 이러한 내용은 은총을 외부에서 주입시키는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아 로마서를 제외한 나머지 성서에서 반박하는 구절도 숱하게 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옹호했고 드디어 이 논쟁은 끝나는듯 했으나,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럽 대륙에서 개신교가 출현하면서 이 논쟁은 재점화되었고, 상기했다시피 루터와 칼뱅이 이 문제를 건드리면서, 이들과 주로 논쟁을 벌이던 가톨릭 신학자들 역시도 이 문제를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톨릭 안에서도 2개의 수도회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주장이 나오게 된다. 공교롭게도 첫번째 수도회는 이단에 대한 논박과 설교가 주특기이며 최고 수준의 신학자들이 모인 도미니코회였고 두번째 수도회는 對 개신교 특수부대이자 떠오르는 신학의 신성 예수회였다. 몰리나(Louis de Molina, 1535~1600)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와 동의를 통하여 초월자의 '철회되지 않는' 절대적 은총이 약속된다고 하였다.

몰리나가 이 주장을 하자, 바네즈(Domingo Banez, 1528~1604)를 대표로 한 도미니코회가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도미니코회는 "너희들 펠라기우스냐?"라고 비판하였고, 이에 맞서서 예수회는 도미니코회보고 "당신들은 칼뱅스럽네?"라고 반박하였다.

이 두 수도회의 격렬한 논쟁에는 다른 수도회의 수도자들과 주교들까지 개입하여 토론하였고 결국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은총의 도움 회의>를 소집하여 결론을 내려 했다. 그러나 1598년부터 1607년까지 이 회의는 거듭 소집되었음에도 이렇다할 결론은 내지 못했고, 결국 교황 바오로 5세가 "앞으로 교황 동의 없이는 이 떡밥으로 저서 출판 금지"라고 선언하여 이 논쟁은 일단 멈추게 된다.

다만 토론이 흐지부지 되긴 했어도, 이후 가톨릭 교회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잠정적인 결론 정도는 어느 정도 나왔다. 우선 은총논쟁에 있어서 극단적인 해석법을 피할 것.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초월자의 은총을 단지 '인간 자유의 결과물'로 떨어트리거나, 혹은 은총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의 구원이 모조리 기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기계적 결정론으로 빠지지 말자는 암묵적 결론이 나왔다.

현대 가톨릭에서의 공식 입장은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구원을 받지만 이에 자유롭게 응답하는 인간의 의지가 뒤따라야 하며, 이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대가 없이 주어진다"는 것에서 대부분이 합의에 도달하고 있다.[11] 다만 절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가톨릭 의화 교리의 자유의지는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와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 개신교 신학자들이 의화 교리를 깔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레퍼토리가 이 자유의지를 빌미로 말장난을 하는 것. 의화교리에서의 자유의지는 절대로 하느님의 선재은총과 동등한 위치가 아니다. 하느님 은총이 선재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여담으로 이 논쟁의 두 축인 도미니코회 예수회는 현대 가톨릭 신학에서 쌍벽을 이룬다. 어찌보면 이때부터 라이벌 관계의 싹수가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논쟁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조상 제사 문제와 Deus(하느님)의 번역 문제를 두고 예수회와 도미니코회는 또 충돌한다. 이를 중국의례논쟁이라 하는데, 이 부분은 천주 항목을 참고해 보자.

개신교 설교에서 간간히 나오는 '우리는 하느님 선택을 받아 이곳에 나와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이야기가 바로 예정설에 근거한다. 하지만 위에 쭉 설명한 바와 같이 예정설은 개신교에서만 발달한 것이 아니다. 이에 반대로, 비슷한 시기에 영향을 받은 가톨릭의 '루뱅(Louvain)파' 내지는 '얀센파(Jansenism)'는 장로교와 거의 동일한 형태의 은총론, 구원론을 주장하기도 했었다.[12] 물론 이는 인노첸시오 10세에 의해 1653년 얄짤없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다만 이 문제는 순수 신학적인 면은 아니었다. 가톨릭 국가 프랑스는 물론이고 네덜란드 쪽에 영토를 가진 오스트리아에도 얀센주의가 많이 퍼졌고, 얀센주의자들은 예수회가 얀센주의를 곡해하여 비방했다고 반발했기 때문에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예수회가 축출되고, 일시적으로 교황청은 예수회를 해산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얀세니즘 파의 정치적 전략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에 얀세니즘적 엄격주의와 근본주의 풍조를 확산시키는데 일조했다. 김희중 대주교의 얀센파에 관한 칼럼

5. 정교회의 구원론

원죄관, 인간관, 은총론 등 신학적인 면에서 완전하게 다른 데다가 이런 논쟁도 거의 없는 정교회는 이 문제를 잘 다루지 않는다. 실제로 정교회 신학에서는 예정설에 대한 비판은 애초에 논하지도 않는다. 정교회의 구원론은 원죄의 개념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교리와 다르다. 선하신 하느님은 완전하고 반대로 죄는 완전하지 못한, 무언가 결핍된 상태로 보기에, 정교회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관까지 상당히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아우구스티노의 저작들은 10세기경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동방교회에 소개되었으나 이미 그 시기엔 동서 교회 분열이 심각해진 상태였다. 또한 구원의 과정과 궁극적인 상태를 천주교와 비슷하지만 다르게 보고 있다. 개신교 신학의 차이가 넘사벽으로 크다는 주장도 있는데 20세기 들어 루터교 핀란드 학파와 정교회의 교류로[13] 정교회의 교리인 케노시스(Kenosis)와 테오시스(Theosis)는 개신교 신학과도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이 정교회와의 공동 연구와 상호 대화를 거쳐 확인되었다.

흔히 하는 일반화로 서방 신학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인간의 죄에 집중한 반면, 동방 신학은 그리스도의 육화와 부활, 인간의 신화(神化, deification)에 중점을 두었다.

여기서 육화는 케노시스, '신화'를 테오시스(θεοσις)라고 한다. 케노시스는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같은 분이신데 자신의 명성(reputation)을 포기하셨다는 의미다. 케노시스는 그리스도의 육화가 그 핵심을 이룬다. 성자께서 모든 특권을 포기하시고(신성·전능·전지·편재·속성) 인간의 몸으로 육화하셨다는 의미다. 하느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비움의 극치를 이루셨다. 이것이 케노시스(Kenosis) 사상이다.

한편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과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되, 형상은 죄로 인해 파괴되지 않으나 모상은 죄로 인해 흐려진다고 본다. 신자들은 삶을 통해 다시금 하느님의 모상으로 돌아가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경륜에 속해있다고 가르치는데., 하느님과 함께하며 신비 안에서 은총에 충만한 것, 더 나아가 하느님처럼 되는 것, 이것이 '테오시스'인 것이다.

물론 하느님처럼 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하느님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스스로 노력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읽으며 노력해야 한다. 이를 시네르기아(synergeia)라고 한다. 정교회 신학에서는 이른 이러한 노력과 의지를 '창조적 그리스도의 모방'이라고 표현한다. 이 과정 안에서 결코 하느님처럼 완전함에 도달할 순 없으나 자기 나름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케노시스를 실천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대체로 정교회 신학은 서구 기독교의 논쟁인 단독설과 협력설 중에 협력설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정교회가 자유의지를 은총보다 강조하지는 않는다. 서구 기독교의 결론과 동일하게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전적인 역사 덕분이지 인간의 행위만으론 불가능하다. 국내에 출간된 소티리오스 대주교의 저서인 <정교회 교리서>에서는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신화에 도달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서술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서술과 함께 있다.

정교회 신자들은 현세의 삶에서 도덕적인 삶, 7성사 참여, 기도 등을 통해 신화에 이르고자 한다. 정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러한 테오시스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14] 전체적으로 개신교보단 같은 보편교회의 역사를 지닌 천주교의 교리와 더 유사한 편.

6. 예정설과 유아 세례

네덜란드 혹은 미국의 화란개혁주의 계열 교회에서는 20세기 초 추정적 중생설[15]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는 아브라함 카이퍼[16]가 일반은총론과 함께 주장했던 것으로,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그 자식에게도 구원의 씨앗(네덜란드어로 zaad)이 존재하므로 세례를 받은 아기는 구원이 예정된 것처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대다수의 화란개혁교회들은 이러한 카이퍼의 관점을 지지했으나 헤르만 훅세마나 클라스 스킬더 등 몇몇 신학자들은 부모가 자녀를 교인으로 키우는데 소홀해지며 개혁교회의 정체성이 뿌리채 뒤흔들릴 수 있다며 이러한 중생론을 반대했고, 나중에는 아예 추정적 중생설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기존의 개혁교단에서 목사와 교수가 쫒겨나 '해방파' 등의 교단으로 분리되는 일까지 일어나기도 했다.[17]

현대에도 '일반은총론', '문화론'과 함께 논쟁이 상당히 엇갈리는 중이다.

[1] 단, 보수 장로교단인 예장합동과 함께 한국 개신교 교단의 양대산맥인 예장통합 교단은 더이상 총회 차원에서 예정설을 주장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문서의 특징 문단 참고. [2] 펠라기우스에 대항해서 선택과 은총을 강조했다는 말이지 교부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했다고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3] 자유의지를 긍정적으로 보긴하는데 펠라기우스처럼 인간히 온전히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아니나. 자유의지에 긍정적이며 협력설 입장이다. [4]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의)포로가 된 자유의지' 라고 설명했다. [5] 알리스터 맥그래스<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에 대하여> [6] 사실 현재 독일농민전쟁은 노임보다는 광부계층이 더 많고 기사, 용병, 몰락 귀족들까지 합세한 다양한 구성이었으며 14~16세기 유럽내 동시 다발적으로 비슷한 민란이 잦았다. 영국의 경우 와트타일러의 난이라는 대규모 농민반란이 있었다. [7] 뮌처는 자신을 기드온의 검이라 자처했고, 이렇게 선택받은 백성들을 가나안 정복시기 이스라엘 백성으로, 기존 상층민을 타락한 가나안 백성으로 선포하여 죽이는걸 정당화 했다. 또한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를 들어 가라지를 처낼 날카로운 낫을 자처했고 농민들이 지배계급과 지주와 기존 가톨릭 교회와 사제, 수도자들을 공격하는데 이용한다. [8] 일부에선 칼뱅이 이중예정을 주장하지 않고, 테오도르 베자 같은 칼뱅의 제자들이 정립했다고 하기도 한다. 칼뱅이 남긴 저작들을 두고 논란이 있는 부분인데 어떤 부분에선 이중예정을 어떤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단일예정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일부에선 칼뱅에게 예정론을 말했어도 후대의 입장과 달리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9] 멜란히톤 주의자들은 칼뱅식 견해를 일부 받아들였다. [10]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가 처음으로 주장한 예정설이다. 이 예정설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천국으로 예정되었고, 믿지 않는 자는 형벌로 예정이 되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11] 이것이 바로 가톨릭의 그 의화(justification) 교리이다. [12] 사실 자세히 따져보면 장로교식 은총론이라 보기는 힘들고 문제의식은 루터&칼뱅적으로 그에 대한 해결은 펠라기우스적으로 한 짬뽕 주장에 가깝다. 아래 김회중 대주교의 설명글 참조. [13] 루터교의 경우 당시 국립 헬싱키 대학 에큐메니컬 신학부 교수진들이 주축. 핀란드는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 지배였기 때문에 정교회가 소수 전래되었고 개신교 입장에서 정교회 연구가 활발하다. [14] 정교회 소개, 한국정교회대교구 [15] presumptive regeneration, '가정적 중생론' 혹은 '중생전제설' 등으로도 번역된다. 여기서 '중생'(重生)이란 단어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 생명이 거듭났다는 뜻이다. [16] 국교회에서 분리하여 독립 교단(아이러니하게도 이 교단은 2004년 국교회와 다시 통합되었다)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VU)도 이 사람이 만들었다. [17] 실제로 해방파를 쫒아내 뒤의 화란개혁교회 총회파는 신정통주의, 진보주의로 급격하게 선회했고, 결국 칼뱅주의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져 나중에는 국가개혁교회(Hervormde)와 재통합되는 데까지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