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7:26:57

여문환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남송의 명장
呂文煥 | 여문환
이름 여문환(呂文煥)
생몰 ?~?
주군 송이종
송도종
원세조
출신 남송(南宋) 숙주(淑州) 안풍(安豊)
국적 남송(南宋) → 원(元)
사망지 원(元) 숙주(淑州) 안풍(安豊)

呂文煥
생몰연대 미상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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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송 말기의 명장. 양양 공방전의 남송측 총지휘관이었다. 남송이 몽골의 침략을 버틸 수 있는 마지막 힘을 준 인물이었으나 양양 공방전이 계속되고 번성이 함락당하자 중과부적으로 결국 항복했다.

2. 생애

남송 숙주 안풍[1] 출신으로, 초기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문환은 당시 형이었던 여문덕[2][3]과 함께 양양 수비를 맡았다.

쿠빌라이 칸이 이끄는 남송 원정군이 남송을 침공해오자, 여문환은 형제들과 함께 1267년부터 1273년까지[4] 몽골의 원정대를 상대로 6년 동안 공격을 버텨낸다. 특히 쿠빌라이 칸을 중심으로 침공해온 4차 양양 공방전 당시에도 무려 1년간 방어를 하였고 양양에 원군을 보내려던 남송과 어떻게든 접촉을 하려 하지만 번번히 좌절된다. 그러자 남송 조정에서 고달[5]로 하여금 양양 방어를 담당하게 하는 것은 어떤지에 대해 논의가 나왔는데, 가사도의 반대로 무산된다.[6]
만약 고달을 기용한다면, 여씨 가문에게 어떻게 인계할 것이오?
이왕(李旺)이 주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씨 가문이 안전하면 조씨 가문은 천하가 위험해지오.
이를 들은 여문환은 고달이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양양 전선에서 승전을 거두고 있다고 허위 보고했다.[7] 공교롭게도 당시 양양 수비군이 몽골 보초기 몇 명을 포로로 잡자 여문환은 송 조정에 대첩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고달로 하여금 양양을 구원하게 하지만 사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가사도 역시 고달을 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게 무려 1년동안 지속된 포위전과 몽골군에서 도입한 새로운 병기인 회회포로 인해 번성과 번성을 잇던 가교가 무너지면서 고립되었고 장병의 사기가 떨어지면서 투항자가 속출한다. 식량은 있었으나 전투 관련 보급 부족, 몽골측에서 1년동안 버틴 충성심을 이해하니 이제 항복하라는 항복 요구에 부하 장수들에게 설득당한 끝에 결국 항복을 하게 된다.

이후 여문환은 당연히 쿠빌라이 칸에게 크게 중용되었으며, 여문환의 항복과 양양의 함락으로 인해 결국 남송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원나라가 남송을 공격할 때, 그는 악주[8] 공격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장강을 지키던 무장들 대부분이 그의 권유로 투항하게 된다. 남송의 수도 임안이 함락될 때, 여문환이 항복을 권고하였는데 남송 최후의 승상이었던 문천상은 여문환에 대해 역신이라고 비난하였고 여문환은 문천상의 비난에 크게 부끄러워했다.

1276년 5월에는 하귀, 범문호, 진혁 등 다른 항장들과 함께 쿠빌라이를 알현한다.

이후 중서좌승이 되어 강동을 위무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1279년 애산 전투에서 남송이 완전히 멸망한 이후 1286년에는 자신이 맡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3. 기타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4에서 남송의 장수로 등장. 6년간 원의 공세를 막아냈다는 점에서 전투 78이라는 준수한 능력치를 받았다. 다만, 수성전이 특기였던 사람인데 특기가 기동 + 돌격이라는 게 흠.

여문덕과 여문신[9]을 제외하고, 여문환 본인을 비롯한 여씨 가문의 일원들은, 모두 원에 항복하고 만다.[10]

양양 공방전 와중에도 여문환은 자신의 이득을 중시하여, 고달 등의 원군이 오는 걸 꺼리고 상황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남송 조정에 유리한 전황이라고 허위 보고했다.


[1] 안후이성 화이난시의 일부 [2] 김용 신조협려에서 터무니없이 폄하된 인물중 하나다. 실제 역사상에서는 모국에 충성한 명장이었는데, 소설에서는 주색에 찌들은 소인배로 나온다. [3] 여문환과 여문덕은 종형 종제 관계이다. 종형인 여문덕은 동생 여문복, 여문신이 있었다. [4] 여문덕은 양양 공성전이 벌어지던 중인 1269년에 사망하였다. [5] 고달은 제2차 양양 전투에서 이증백의 수하로 있을 때 양양을 수복한 공이 있었고, 서류관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했으며, 백하 전투에서는 몽골군의 동문위를 격파했고, 제3차 양양 전투에서는 타차르가 이끄는 몽골군을 격파하고 악주 전투에서는 공언휘를 계략으로 주살하는 등 경호 전선에서 명성을 드날렸다. [6] 고달은 악주 전투 당시 자신의 군공을 믿고 가사도를 업신여긴 적이 있었다. [7] 여문환과 고달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8] 오늘날 호북성 무한시 무창구 [9] 제2차 몽송전쟁 악주 전투에서 전사했던 여문신과 동명이인으로, 1275년 원나라의 군대와 조우해 전사했다. [10] 대표적으로 여사기, 여문덕의 사위 범문호, 여문덕과 동향인 하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