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2 12:41:07

양헌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양헌(楊憲, ?~1370)은 명나라의 관료, 정치가, 개국공신으로 는 희무(希武). 홍무제로부터 받은 이름은 필(畢)이다.

정치적으로 유기를 위시한 절강 출신의 귀족들에 속하여 회서파의 거두인 이선장과는 크게 대립하였다.

2. 생애

태원 양곡현(陽曲縣) 출신으로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 강남으로 왔다. 1356년(지정 16년) 주원장 금릉을 점령하면서 하욱(夏煜), 손염(孫炎) 등과 함께 발탁되어 별다른 벼슬 없이 유사(儒士)로서 서기를 맡았다. 1360년(지정 20년) 이전에 도사(都事)가 되었다. 1362년(지정 22년) 절동행성(浙東行省)의 좌사낭중(左司郎中)이 되었다. 1367년(지정 27년) 참지정사(參知政事) 장창(張昶)이 원나라에 몰래 편지를 보내려는 것을 조사해서 알아내어 그를 주살당하게 만들고 참지정사가 되었다. 어사중승(御史中丞)[1] 유기 등 19인과 함께 의율관에 임명되어 총재관 좌승상(左丞相) 이선장을 따라 명나라의 형법 대명률을 제정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1368년(홍무 원년) 명나라 건국 이후에도 참지정사로서 변량에 중서분성(中書分省)이 설치되자 그 업무를 같이 처리하였다가 곧 어사중승으로 옮겼다. 1369년(홍무 2년) 산서행성(山西行省)의 참정(參政)이 되었다가 다시 중서성(中書省)의 우승(右丞)이 되었다. 1370년(홍무 3년) 좌승(左丞)이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시어사(侍御史) 유병(劉炳)이 이전에 양헌이 자신을 조종하여 우승(右丞) 왕광양(汪廣洋)을 탄핵하여 면직시키고 자신도 해남으로 쫓아내려다 홍무제가 따라 주지 않자 형부시랑(刑部侍郞) 좌안선(左安善)에게 자신을 모함하여 감옥에 갇힌 사정을 당시 태사령(太史令)이었던 유기에게 실토함으로써 왕광양 탄핵을 임의로 꾸민 혐의로 유병과 함께 처형되었다.

유기와는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주원장이 유기의 속을 떠보려고 호유용, 왕광양과 함께 승상으로 임명하려는 인물로 거론되었지만 승상으로서 재능은 있지만 그릇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됨이 가혹하여 중서성을 맡자 엄청난 권력을 가진 이선장과 대립하는 것을 이용하기 위해 주원장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1370년에 주원장에게 상인들이 북방에 운송한 군량, 군수물자를 운반하면 그 양만큼 소금으로 바꿔주는 개중제를 건의하기도 했다.

3. 대중매체에서

2006년에 방영한 중국 드라마인 주원장에서, 유기의 제자 출신으로 이선장과 대립하면서 주원장에게 총애를 받으며 이용당하는 역할로 나온다. 원나라 말기의 전란으로 피폐해진 양주로 부임해서 5년 안에 양주를 부흥시키겠다는 명을 완수하여 그 공으로 중서좌승이 되면서 권력을 휘두르자 유기가 그를 멀리하게 된다.

주원장의 명으로 과거 시험장의 돌판이 부서진 곳이 있자 그 감독관이 작중 설정으로는 주원장의 동향 아저씨쯤 되는 사람인데 주저없이 붙잡아 처형하는 등, 법을 어기는 여러 사람들을 붙잡아 주저없이 죽이는 가혹한 면모를 보였다.

또한 호유용, 왕광양과 대립하지만 결국에는 양주에서 장부를 조작하고 상인에게 물자를 전부 사서 그를 죽이고 은폐하여 부흥한 것처럼 꾸미고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루어 일을 시킨 사실을 그를 조사하던 호유용에게 발각되며 이 사실을 보고받고 주원장에게 알려져 기군망상으로 처형된다.


[1] 벼슬아치들을 감찰하는 어사대의 차관급 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