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20:07:50

시마즈의 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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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마즈군의 상황3. 세키가하라에서4. 앞으로 퇴각한다5. 평가6. 조선 측의 기록7. 각종 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

島津の退き口

세키가하라 전투 중에 있었던, 적진을 향해 철수한다는 시마즈 군의 퇴각전이다. 일본어로는 島津の背進이라고도 한다. 한국어로는 정해진 번역어가 없고 시마즈의 퇴각, 전진철수 등으로 부른다.

서군이 패배하면서 도망치던 와중에 포위까지 당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수하들의 희생 끝에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망에 성공했다. 후퇴 시 보여준 처절한 무용과 광(狂)적인 모습 때문인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집요한 숙청과 개역의 마수로부터 사츠마는 꽤 온전히 세력을 보존시킬 수 있었다.

2. 시마즈군의 상황

임진왜란에서의 패전 후,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사츠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후 시마즈는 사츠마, 휴가, 오스미 3국만을 인정받게 되는데, 히데요시의 이간책으로 휴가는 요시히로에게, 오스미는 히데요시와 협상을 이끈 이주인 타다무네에게 주어졌다. 임진왜란에서도 다른 영지가 그렇듯 원하지 않았음에도 히데요시의 징병 압박에 시달렸고,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파병에 반대한 시마즈 요시히사와 히데요시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요시히로 간의 반목도 시작된다. 또한 1599년에 이주인 타다무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해서 미리 제거했고, 이 때문에 그의 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가 처음 파병하러 간 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시미성 방어 지원 요청 때문이었다. 때문에 대군을 동원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해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해 버렸고, 후시미 성주 토리이 모토타다는 요시히로의 입성을 거부한다. 이에 대해서는 시마즈 쪽의 자료만이 남아있어, 사실 어떠한 배경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되질 않는다. 어차피 소수에 얼마 안 가서 함락됐으니 시마즈군까지 길동무 삼을 필요 없다는 선의일 수도 있다.

이렇게 시마즈군은 서군 한복판에 남겨진 꼴이 되었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게 되어 서군에 참가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본국에 지원 요청을 하지만 요시히사는 들어주지 않았고, 시마즈 토요히사 등 수백여 명만이 가문의 뜻과는 별개로 각자 요시히로를 도우러 왔다고 한다. 이렇게 모인 시마즈군의 규모가 약간씩 다른데 이 때문일 것이다. 보통 1500명 ~ 1600명 정도로 본다.

이렇기에 요시히로가 시마즈 가문 차원에서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고 직접 모은 병력만 간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요시히사 등 가문에서 이를 지원하지 않은 이유는 여러 설로 갈린다. 위의 상황 때문에 보내고 싶어도 못 보냈다는 것, 서군에 참가한 요시히로에 반대했다는 것, 임진왜란 때의 무리한 징병과 피해로 인해 여력이 없었다는 점[1] 등이다. 어떤 이유든 요시히사는 세키가하라에 적극적으로 참전하는 것, 최소한 서군으로 적극 참전하는 건 반대했음이 분명하고 덕분에 나중에 모두 요시히로 때문이라고 떠넘기며 시마즈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3. 세키가하라에서

최초의 조우전에서 미츠나리가 자신과 사츠마 군대를 버려두고 도망가 버렸고, 그가 주장했던 야습도 무시당했다. 이런 굴욕에 그는 이런 큰 싸움에서 결국 관망만 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요시히로의 큰 실책 중 하나가 되었다.

전투에서 시마즈군은 본진의 서쪽에 위치해 비교적 최전선에 있었지만 침묵한다. 초반에 우키타 히데이에가 분전해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일시 패퇴시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미츠나리가 참전을 요구하는 사자를 보내자 말에서 내리지 않고 말했다는 게 군법에 어긋나고 시마즈를 모욕했다면서 죽이려고 달려들 정도였다. 전황이 밀리자 미츠나리가 직접 와서 부탁했지만 "오늘 전투는 각 부대가 스스로의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승패는 하늘이 정할 터"라고 대답했고, 계속 요청을 무시한다. 나중에 우키타 부대가 패퇴할 때는 자기네 구역을 지나서 퇴각하자 사격을 가해서 '자기 편에게 총 쏘는 머저리 같은 놈들'이라고 욕도 먹었다.[2]

이런 정치 감각 떨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한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없다. 미쓰나리가 무시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면 정말 큰 실책이다. 그런 무시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게 당시 무사들이나 사츠마 무사들의 가치관일 수는 있을 것이다. 역시 현대인 입장에서 이해하기는 힘든 부분이겠지만 말이다.

반면 서군이 패할 가능성을 점친 것이라면 납득이 된다. 어차피 소수에 대장에게 무시당하고 있으니 큰 전공을 세울 순 없을 것이고, 서군이 이기더라도 큰 포상을 받기도 힘든 상황이다. 반면 미츠나리의 군재가 부족함을 아는 상황에서 동군이 이길 경우를 대비했다면, 동군에 피해를 최대한 덜 주려는 방침일 수 있다. 후술할 이에야스의 본진을 지나칠 때 한 행동이 맞다면 이걸 의도했을 것이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이 동군으로 배신, 서군은 패주하게 된다. 동군은 서군 본진으로 밀고 나가면서 시마즈군의 퇴로가 끊겼고, 시마즈군도 공격받게 되었다.

서군의 패배가 확실해진 상황, 여기서 시마즈군은 참으로 황당한 결정을 내린다.

4. 앞으로 퇴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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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요시히로는 자결을 결심했지만,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가 설득해서 막는다. 대장 격인 다이묘가 죽는 것은 사츠마는 물론이고 당시 일본에서 절대 막아야 할 일이었다. 이에 시마즈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요시히로만은 탈출시킨다는 결론을 내리고 퇴각을 결심한다.

문제는 퇴로가 끊겼고 후퇴할 곳은 후방의 험한 이부키 산맥이었다. 이동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던 것, 거기에 사츠마로 돌아가기 전에 오사카에 있는 인질들도 구해서 가야 했기에 빠르게 가야 했다. 이에 시마즈군은 적진을 돌파해서 이세로(路)를 통해 퇴각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적이 대부분 서군 본진에 가 있기에 의외로 전방이 병력의 밀도가 낮았던 점도 고려됐을 것이고 전쟁광 이미지인 시마즈군 특유의 정신도 한몫했을 것이다. 시마즈군은 깃발을 버리고 부대 표식을 부러뜨린 후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징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동군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시마즈군을 상대하지 않았고, 차츰 동군 본진으로 오자 혼다 타다카츠 이이 나오마사는 이들을 포위하려 하였다. 이때 시마즈군이 쓴 전술이 바로 가문 고유의 진법 스테가마리(捨て奸)였다. 본진이 도주하는 동안 수 명의 팀으로 나눈 저격수가 후미에 남아 추격해 오는 적 부대의 지휘관을 저격하고, 저격 후에는 총을 버리고 적진에 뛰어들어 시간을 번다(이하 반복)는 진법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간 벌기로 투입된 병사는 전사가 확실하기 때문에 인망이 없는 지휘관은 절대로 쓸 수 없는 전술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이 진법을 쓰는 와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 옆을 지나치기도 했다. 이때 부하에게 "시마즈 요시히로, 이번에 뜻하지 않게 적이 되어 싸우다가 지금 막 진 앞을 지나 본국 사츠마로 돌아가옵니다! 내 마음에 대해선 훗날 바로 말씀 올릴 것이외다!"라고 외치게 했다고 한다.

조카 시마즈 토요히사와 가신 쵸주인 모리아츠가 요시히로의 갑옷을 입고 카게무샤 역할을 하였다. 둘 다 전사했고, 모리아츠는 죽기 직전까지도 "시마즈 요시히로가 여기 있다!" 고 외쳤다고 한다. 이렇게 적지에서 벗어났을 때, 병력은 50명 ~ 8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도쿠가와 측에서는 이들을 막던 이이 나오마사가 저격당했고, 2년 후 상처가 악화돼 병사한다. 또한 나오마사의 사위로 함께 첫 출전 했던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도 저격당해서 나오마사가 죽은 후 얼마 안 돼 병사한다.

그리고 이들의 목숨을 바쳐서 요시히로는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이세로를 따라 이가성을 지나 오사카로 가서 인질을 구출했고, 세토 내해를 가로질러서 영지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도망가던 중에 같은 서군 소속인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만난다. 무네시게의 친부 쇼운이 시마즈 가문과의 전투에서 죽었기 때문에 무네시게가 복수를 생각한다면 80명밖에 없는 시마즈군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일전의 은원 관계는 잊은 지 오래입니다. 함께 힘을 합쳐 규슈로 갑시다'라며 군자다운 태도를 보여 요시히로는 크게 감격한다. 이후 영지로 돌아간 무네시게가 주변의 나베시마, 구로다, 가토 등의 동군 세력에게 협공당하자 은혜를 잊지 않은 요시히로는 지원군을 보내주기도 했다.[3]

5. 평가

조선, 등 일반적인 중앙 집권 국가 시각으로 보면 장군 하나 살리자고 병력을 전멸시키는 선택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개 장군이 아니라, 이라고 생각해 보자. 전국 시대 일본의 다이묘들은 소규모 왕국의 왕이나 다름없었다.[4]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군의 목숨을 우선시했고, 주군이 죽을 경우 자신도 몰락하는 시대였다. 대장이 제대로 도주하지 못하고 따이면 부하들은 가족에게 돌아갈 몫도 다 뺏기고 주군도 제대로 못 지킨 놈 낙인이 찍혀 무사로써의 커리어가 끝장났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군이 죽으면 따라 죽거나 추신구라처럼 복수하는 게 당연시됐다. 이렇기에 적 본진을 통과해 퇴각하고 전멸했어도 대장을 살린 이 작전이 높게 평가받은 것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당장 자기 목숨 하나 살리자고 귀한 부하들을 다 날리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전멸이 확실 시 되는 상황에서 왕이라도 살렸으므로 매우 성공적인 퇴각전인 것이다. 실제로 같은 전투에서 퇴각하지 못하고 잡힌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츠나리의 경우, 그들이 처형당하고 가문이 멸족된 뒤, 휘하에 있던 무사들도 로닌이 되어 빈곤층으로 전락했는데, 이에 비해 이 전투에서 전사한 시마즈 휘하 무사들의 가족들은 상대적으로 있던 것이라도 건사할 수 있었다.

이를 일본만의 특이한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한국만 봐도 동천왕을 살리기 위해 밀우, 유유 등이 결사대를 데리고 목숨을 걸었고, 왕건을 살리기 위해 공산 전투에선 신숭겸, 김락 등의 수많은 고려 장수들이 죽었다. 중국 역시 조조를 살리기 위해 죽은 조앙 전위, 한고제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기신 등 이런 "왕만 살면 그만이야" 작전은 흔하게 보인다. 시마즈의 퇴각은 그 중에서도 특히 극단적인 사례라 계속 회자되는 것. 그리고 앞서 서술했듯이 이부키 산맥 방향의 퇴로는 이미 차단되어 있는 상황이었던 만큼 통상적인 방식으로 전선의 후방으로 퇴각을 했어도 피해는 컸을 것이라, 그나마 이 방법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전진 퇴각으로 인해 큰 피해가 있을 것이라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고 시마즈 요시히로 정도의 인물이면 당연히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은 이것 하나뿐임을 빠르게 파악하고 이를 과감히 시행하였으며, 실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생존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동군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시마즈의 퇴각은 요시히로의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퇴각이라 할 수 있으며, 범장은 손해 보지 않는 작전을 짤 때 명장은 이길 수 있는 작전을 짠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아울러 병사들이 모두 자원해서 요시히로를 따라왔다는 점, 그들 전원이 거의 100% 전사가 확실한 전투에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점은 그가 평소에 부하들에게 인망을 충분히 쌓았음을 말해준다. 이런 모습 덕분인지 시마즈 요시히로의 평가는 당대나 현대 일본에서나 높은 편이다.

사실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적진으로 빠져나가는 건 역사상으로도 드물고 대단한, 정예군들만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포위를 당했을 때 일점돌파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목표 지점을 빠르게 뚫고 나아갈 돌파력이 있고, 그 후미를 맡을 병사들도 강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예들이어야 한다. 이것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돌파 중에 다시 포위되어 결국 전멸한다.

한편, 시마즈 가문 입장에서도 당시의 전진 퇴각은 신의 한 수가 되었는데, 시마즈 요시히로가 규슈로 돌아간 후 시마즈 가문은 모든 책임을 요시히로에게만 돌렸고, 그 과정에서 요시히로가 치매 기운이 있어서 의원들을 모아다 놓고 치료 중이라며 해명했는데, 도쿠가와 측이 이를 다 믿진 않았겠지만 시마즈를 가이에키(改易(개역)-영주교체=영지몰수)나 텐푸(転封(전봉)-영지이동=영지축소)에 처하지 않고, 요시히로가 직위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정리했다.[5]

사실,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독단적으로 참전하여 소수만 이끌고 참전한 탓에 퇴각 때 말고는 열심히 싸우지 않은 점 등만으로 볼 때도, 굳이 엄하게 다스릴 이유가 없었던 게 가장 크겠지만 그 퇴각 때 시마즈군이 강병이라는 것을 이에야스에게 확실히 보여준 점, 동군이 그냥 보내줬으면 되는데 굳이 잡아 죽이려다가 피해를 자초한 측면이 큰 점 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시마즈 가문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한 이유에 포함됐을 것이다.

그리고 시마즈 가문의 사츠마 번은 이때의 패배를 잊지 않고 칼을 갈다 훗날 무진전쟁에서 존황파 삿초 동맹의 한 축으로서 참전하여 에도 막부를 멸망시키면서 오랜 원한을 갚게 된다.

당시 서군 총수였던 관서의 모리 가문은 주고쿠 6국 120만석을 자랑하는 대가문이었지만, 철저하게 보복당해 석고가 30만석으로 감액당했다. 이 때문에 모리 가문의 조슈 번은 그야말로 원한이 골수에 스며들어 막부 말기에는 존황 세력의 대표적인 강경파로 막부 타도를 부르짖었지만, 시마즈 가문은 개역이나 전봉 조치를 당하지 않는 등, 관대한 조치를 받아서 상대적으로 원한이 적었다. 그래서 사츠마는 상당 기간 동안 막부 타도가 아닌 공무합체를 주장했고 이를 위해 같은 존황파인 조슈 번을 공격하거나 갈등을 빚는 등, 삿초 동맹 결성 이전에는 막부보다 조슈 번과의 관계가 더 나빴었다.

6. 조선 측의 기록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7년 뒤인 1607년에 파견되기 시작한 조선 후기의 통신사들은 조선과 일본의 우호를 다지는 한편 일본의 사정을 살피는 것이 기본 임무였는데, "원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물리치고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자는 과연 어떤 자인가?" 라는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 세키가하라 전투를 비롯해 도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잡게 된 내막에 대해서도 알아내려 했다. 그리고 이 결과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한 것은 물론 시마즈의 퇴각에 대한 것도 사행록에 남게 되었는데, 1607년의 통신부사였던 경섬의 "해사록"에 가장 자세하게 나온다. 아래는 그 내용.
살마주 태수(薩摩州太守) 의홍(義弘)이 그의 아들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관원(關原)에서 휘원(輝元)을 따르게 하였다. 휘원이 패하여 동병(東兵)이 사방을 에워싸자 살마의 병사들이 외치기를,
“우리는 살마 태수 의홍의 군대다. 너희들이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길을 열어라.”
하였다. 살마의 군사는 본래 정예롭고 강하기로 이름이 나 감히 맞서서 겨룰 수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포위를 무너뜨리고 군대 전체가 나왔다. 의홍의 아들이 도중에 말하기를
“살마의 군대를 천하의 강군이라고 하는데 이제 패하여 달아나니, 장차 무슨 낯으로 다시 돌아가 아버님을 뵐 것인가?”
하고, 마침내 스스로 목을 베어 죽고 휘하 장수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가게 하였다. 그 뒤에 의홍도 또한 가강에게 복종하여, 예전의 벼슬을 그대로 맡았다고 한다.

(薩摩州太守義弘, 令其子領兵, 從輝元於關原. 及輝元之敗, 東兵四圍, 薩摩軍兵等揚言曰, 我是薩摩太守義弘之軍也. 爾等欲戰則戰, 不能則開路. 薩摩之兵, 素稱精强, 莫敢抵當, 遂潰圍全軍而出. 義弘之子至中道曰, 薩摩之兵, 天下稱强, 今敗而走, 將何顏面更歸見父. 遂自剄, 使其麾將, 領軍而還. 其後義弘, 亦屬於家康, 仍帶舊職云.)

7. 각종 매체에서의 모습

시마즈 요시히로의 중요한 에피소드로 거론되며, 짧고 굵게 간 시마즈 토요히사가 주목을 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드리프터즈, 이거 하나로 주인공이 되었다.

NHK 대하드라마에서 세키가하라 전투가 나올 때 그리 주목을 받진 않는 편이다. 전투 자체가 주요 부분[6]과 해당 작품의 주인공만 나올 때가 많기 때문이다. 2000년에 나온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는 예외로, 세키가하라 전투 400주년을 기념해 대규모 전투를 보여주었고, 덕분에 전투의 화려한 대단원으로 시마즈의 퇴각도 보여줄 수 있었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구현하기 힘드니 나오기 힘들다.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는 PK에서 시마즈 가문 전국전으로 추가되었고 영상도 추가되었다. 본인 전국전은 물론 세키가하라 전국전 자체에서도 제법 비중이 있는 편이기도 하다.

전국무쌍에서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나온 2에서부터 계속 중요한 에피소드로 나온다.

전국무쌍 2에서의 영상

시마즈 토요히사 클론무장인데도 비중이 높다. 여기서는 동군을 다 쓸어버린 다음에 서군도 다 쓸어버린다.

전국무쌍 4에서의 영상

세키가하라 전투를 서군으로 플레이할 시, 토요히사와 요시히로는 무조건 함께 선택하게 되며 이 전투를 자신의 목숨을 버릴 곳이라고 결정해 요시히로를 먼저 보내고, 자신은 백부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조총 난사로 추격해오는 적들의 발을 묶는다. 이이 나오마사가 나오지 않아서인지 이벤트 영상에서 이이 나오토라를 상대하다 혼다 타다카츠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 사망하며, 죽기 직전, "전장에서 투구를 떨어뜨리는 것은, 무사의 수치다."라는 요시히로의 충고를 떠올려 투구를 확인한 뒤, 떨어뜨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부끄럽지 않은 죽음이었다며 미소 지으며 숨을 거둔다.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비슷한 묘사가 나온다. 관음포에 갇힌 시마즈 군에서 탈영병들이 도망치려다 도로 붙잡혀 오는데,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들을 죽이는 대신 "살고 싶으냐? 저 마귀들(조선, 명나라 수군)을 물리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저 마귀들을 뚫고 간다! 그래! 꼭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두 몸부림쳐라! 그러면 반드시 돌아갈 수 있다."라고 말하며 사기를 북돋고 조명 연합 수군을 향해 진격한다.
[1] 내부 상황설이 맞다면 최소한 그 이유 중 하나는 되었을 것이다. [2] 그러나, 패잔병들이 진지를 지나면, 전열이 흐트러지고 혼란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총을 쏴서 못 지나가게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애초에 동군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시마즈 입장에서는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3] 하지만 요시히로의 도움은 별 의미가 없었는데 정작 원군이 도착했을 때 이미 무네시게는 구로다와 가토 등의 설득으로 항복한 뒤였다. [4] 일본은 자신들의 나라를 하나의 제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다이묘들의 영지가 으로 칭해진 것이다. [5] 요시히로는 진짜로 노인이 되어서는 치매에 걸려 용변조차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고, 가신이 출전의 소라고동을 불 때 잠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6] 양측의 격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