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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2대 국왕 아폰수 6세 Afonso V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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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43년 8월 21일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히베이라 궁전 | |
사망 | 1683년 9월 12일 (향년 40세) |
포르투갈 왕국 신트라 신트라 궁전 | |
재위 |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
1656년 11월 6일 ~ 1683년 9월 12일 | |
배우자 | 사보이아의 마리 프랑수아 (1666년 결혼 / 1668년 무효화) |
아버지 | 주앙 4세 |
어머니 | 루이자 데 구스만 |
형제 | 테오도시우, 주아나, 카타리나, 페드루 2세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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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2대 국왕. 별칭은 승리왕(o Vitorioso)이다.2. 생애
1643년 8월 21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의 히베이라 궁전에서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와 스페인 귀족 후안 마누엘 페레스 데 구스만의 딸인 루이자 데 구스만의 3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테오도시우, 안나, 주아나, 카타리나, 마누엘, 페드루 2세가 있었다. 그는 3~4살 때 심각한 열병에 시달렸고, 이 여파로 인해 온 몸의 오른쪽 부위가 마비되었고 정신 질환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궁궐 구석에서 조용히 지냈다.1653년 5월 13일, 큰 형 테오도시우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차남 마누엘은 1640년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기에, 아폰수가 살아남은 아들들 중 연장자였다. 주앙 4세는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아폰수를 왕위 후계자로 지명했다. 1656년 11월 6일 임종을 눈앞에 둔 주앙 4세는 루이자 왕비를 정신병에 시달리는 아들의 섭정으로 삼았다. 루이자는 자신을 보좌해 줄 이로 오데미라 백작 프란시스쿠 드 파루를 선임했으며, 주앙 4세를 따랐던 관료들의 직위를 유지시켰다. 그러나 내각에 참여한 이들 중 누누 알베레스 페레이라 드 멜루와 프란치스코 데 파루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면서 궁정 음모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아폰수는 통치자로서 수행해야 하는 모든 정무를 어머니와 대신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왕궁 창문 너머에서 낮은 신분의 소년들이 게임을 하는 것을 지켜봤다. 아이들이 간혹 감정이 격해져 싸움박질을 벌이는 일이 종종 벌어졌는데, 그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을 응원하며 손뼉을 쳤다. 그러던 어느 날, 여성 장신구를 판매하던 제노바 상인 안토니오 콘티가 왕이 응원하는 그룹에게 박수를 보냈다. 왕이 이에 호기심을 품고 접근하자, 그는 장신구를 왕에게 제공하는 동시에 흑인, 무어인 등 노예 소년들을 싼값에 넘겼다. 궁궐 한 구석에서 외롭게 지내던 아폰수는 이 소년들을 친구로 사귀면서 안토니오 콘티에게 깊은 호감을 품었다.
1660년 성년의 나이가 되면서 자신만의 궁정을 얻게 된 아폰수는 안토니오 콘티를 궁궐 내로 들여서 왕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방에 투숙시켰다. 이후 일개 상인인 콘티를 귀족으로 승격시켰고, 그리스도 기사단의 일원으로 삼았으며 수입이 1,000 크루자두에 달하는 예배당을 넘겨주었다. 일설에 따르면, 아폰수는 콘티가 제공하는 여성용 장신구 및 의복을 입고 밤에 친구들과 함께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고 한다. 어머니 루이자와 프란시스쿠 드 파루 등은 그런 아폰수에게 콘티와 노예 소년들을 내보내라고 권고했다. 아폰수가 끝까지 거부하자, 루이자와 프란시스쿠는 콘티와 소년들을 강제로 추방시켰다.
아폰수는 친구들을 쫓아내고 연락하는 것도 막아버린 어머니와 대신들을 몹시 원망했다. 그런 왕에게 루이자 왕비의 시녀였던 필리파 드 빌헤나[1]의 아들 예로니모 드 아탈데와 루이스 드 바스콘셀루스 이 소자가 접근했다. 그들은 곧 왕의 또다른 '친구'가 되었고 눈부신 출세가도를 밟았다. 예로니모는 1569년 알렌 테호 총독에 선임되었고 1662년 왕립 해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었으며, 루이스는 포르투갈 총독에 선임되었다.
이렇듯 왕이 국정에 손을 떼고 있는 동안, 루이자와 대신들은 스페인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을 수호하고자 노력했다. 1657년, 카탈루냐 반란을 종식시킨 스페인 정부는 리스본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를 벌여 전쟁을 끝내기로 작정하고 병력을 모집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이에 맞서 선제 공격을 하기로 하고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기습 공격했으나 수비대의 저항으로 패퇴했고, 1658년에 다시 바다호스를 공략하려 했으나 또다시 격퇴되었다. 1658년 말 스페인 장성 루이스 데 하로가 엘바스를 포위해 3개월간 공성전을 벌였으나 페스트에 시달리다가 1659년 1월 14일 안토니우 루이스 드 메네세스가 이끄는 포르투갈 구원군에 의해 참패하여 13,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했다.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전쟁을 종식하는 피레네 협정이 체결되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이 회담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인정하고 전쟁을 종식할 것을 제안했으나 스페인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후 스페인이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베테랑 병사들을 포르투갈 국경에 집중 배치해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자, 포르투갈 정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루이 14세는 피레네 협약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포르투갈을 돕기로 하고, 독일 출신의 프랑스 장교 프란치스코 아르만도 드 쇤베르크의 직위를 헤제시키고 포르투갈군 군사고문으로 파견했다. 여기에 1661년 찰스 2세와 브라간사의 카타리나의 결혼이 성사되었고, 잉글랜드에서 2,000명 이상의 병력이 포르투갈에 파견되었다.
한편, 네덜란드와의 갈등은 아폰수 6세 치세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여전히 앙골라와 브라질에서 현지 포르투갈인들과 교전했고, 포르투갈 상선을 지속적으로 습격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독립 전쟁, 영국-네덜란드 전쟁, 스웨덴과의 발트해 분쟁을 연이어 치르면서 지칠대로 지친 네덜란드 민중은 평화를 갈망했고, 더 이상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네덜란드 정부는 포르투갈과 평화 협정을 맺기로 했다. 무엇보다 계속된 전쟁으로 네덜란드의 국력도 한계에 달하여 그 동안 포르투갈을 밀어붙이던 네덜란드가 이 시점에 도달하면 오히려 밀리는 추세였던 점도 한몫했다. 그 결과 1661년 8월 6일, 네덜란드는 세투발의 소금 무역을 재개하며 네덜란드령 브라질을 포르투갈에 매각하고 포르투갈은 16년간 네덜란드에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내용의 헤이그 조약이 체결되었다. 헤이그 조약 이후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에 대한 모든 적대 행위를 전면 중단했다.
1661년, 펠리페 4세의 사생아인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아롱시스를 공략하여 엘바스에 주둔한 포르투갈군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이에 포르투갈군은 군대를 국경 부근에서 대거 철수시켜 이스트레모스에 집결시켰다. 1662년, 스페인은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에게 대군을 맡겨 포르투갈을 대대적으로 침공할 준비에 착수했다. 후안은 군대를 3부대로 나눠 각기 다른 방향에서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보병 16,000명과 기병 6,000명으로 이뤄진 군대를 이끌고 진군을 개시해 1662년 6월 주로멘하를 공략했다.
1662년 6월, 아폰수 6세는 루이자 왕비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별궁에 유폐할 거라는 루이스 드 바스콘셀루스의 참언을 듣고 루이자의 섭정 자격을 박탈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루이자는 아구스티노스 데스칼로스 수녀원에 은퇴한 뒤 여생을 보내다 1666년 2월 27일에 사망했다. 그녀는 영국 왕비이자 자신의 딸인 브라간사의 카타리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궁정 음모로 은퇴당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도, 나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아폰수의 미래를 염려했다. 또한 임종을 맞이하기 전날 작성한 유언장에서 아폰수를 상속인으로 정하고 자신의 이름과 관련된 자선 사업을 이어가라고 부탁했다. 아폰수는 어머니를 실각시킨 뒤 루이스에게 모든 정무를 맡겼다.
1663년, 본격적으로 포르투갈 깊숙이 진군하여 알렌테호에 도착한 후안은 그 지역의 주요 도시인 에보라를 포위해 수개월간 포위 공격한 끝에 1663년 5월 22일에 공략에 성공했다. 뒤이어 135km 떨어진 리스본을 향한 원정에 착수한 후안은 적 습격대의 보급로 교란으로 인해 식량난에 시달리자 일단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곡창지대인 아메이시알 평원으로 향했다. 이에 프란치스코 아르만도 드 쇤베르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먼저 아메이시알 평원에 도착해 스페인군이 오기를 기다렸고, 그해 6월 8일 아메이시알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스페인군은 4,000명이 전사하고 대포 18문을 포함한 모든 포병과 보급품이 노획당하는 참패를 당한 채 바다호스로 패주했다. 프란치스코는 여세를 몰아 6월 24일 에보라를 포위 공격한 끝에 3,700명으로 구성된 스페인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뒤이어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포위 공격한 끝에 1664년 6월 24일에 공략했다. 그 후 스페인 측이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한동안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1665년, 펠리페 4세는 포르투갈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해 전쟁을 종식하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스페인 사령관으로 카라세나 후작 루이스 데 베나비데스를 선임했다. 루이스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모집한 용병을 추가한 22,6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통솔했다. 그는 적 병력을 압도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더 많은 병력을 모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펠리페 4세의 병세가 악화되자, 스페인 당국은 왕의 죽음이 포르투갈에 대한 외국의 지원을 강화할 것을 두려워했다. 게다가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시간을 질질 끌면 군대를 유지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에게 침략을 진행하도록 명령했다.
사전에 첩자들을 파견하여 적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 포르투갈 측은 즉시 반격에 나섰다. 포르투갈군 총사령관 안토니우 루이스 드 메네세스는 엘바스와 캄포마이오르의 국경 수비대를 강화해놓아서 적이 그곳을 회피하고 다른 길을 택하도록 유도했다. 루이스는 병력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두 곳 대신 보르바 쪽으로 이동했다. 며칠 후 수비대가 철수하여 텅 빈 보르바에 무혈 입성한 그는 뒤이어 빌라 비소사를 포위 공격했지만,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서 1,500명 가량의 사상자를 기록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스페인 당국은 루이스에게 빌라 비소사 공략을 포기하고 리스본으로 계속 진군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이를 듣지 않고 공방전을 이어갔다.
적이 몇달 동안 요새 공략에 매달리느라 물자와 병력을 낭비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안토니우 드 메네세스는 적군이 회전을 벌이도록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적보다 열세한 병력을 이끌고 접근했다. 루이스는 이 소식을 접하자 즉각 그들과 교전하기로 마음먹고, 일부 병력을 남겨서 요새를 계속 포위하게 한 뒤 자신은 22,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포르투갈군에 접근했다. 이리하여 1665년 6월 17일에 발발한 몬테스 클라로스 전투는 스페인군의 재앙이었다. 포르투갈 측은 2,700명의 사상자만 낸 데 비해, 스페인군은 8,000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6,000명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그 후 스페인은 더 이상 포르투갈을 향한 공세를 단행하지 못했다.
1665년 2월 24일, 아폰수 6세와 느무르 공작 카를로 아마데오의 딸이며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증손녀인 사보이아의 마리 프랑수아의 결혼 계약이 파리에서 체결되었다. 결혼식은 6월 27일 라로셸 에서 대리로 거행되었고, 왕비는 8월 2일 리스본에 도착했다. 그러나 왕비는 왕을 만난지 불과 이틀 만에 고해사제인 예수회 프란시스코 데 빌라에게 "왕의 성 기술이 너무 부족하고 무력하다"고 불평했다. 그녀는 몇달 간 왕과 성관계를 가지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1667년 초 "Nossa Senhora da Esperança(희망의 성모님)" 수녀원으로 은퇴한 뒤 교황청에 아무리 노력해도 '결합'이 성사되지 않았다며 결혼 무효를 요청했다.
1667년 11월, 아폰수 6세의 동생인 페드루 왕자가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뒤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권신인 루이스 드 바스콘셀루스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마리 프랑수아 왕비와 밀회해 그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1668년 3월 27일 교황청의 결혼 무효 승인이 리스본에 도착하자, 페드루는 아내와 관계를 갖지도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 왕이 나라를 이끌 수 있을 리 없다며, 자신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리스본에서 소집된 코르테스는 아폰수 6세를 폐위시키지 않는 조건하에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 후 페드루는 섭정으로 군림하고 마리 프랑수아 왕비와 결혼했고, 아폰수 6세는 테르세이라 섬에 유폐되었다.
그 후 그곳에서 5년간 머물던 아폰수 6세는 1674년 9월 리스본으로 송환된 뒤 산트라 궁전에 이송되어 9년간 그곳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1683년 9월 12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사후 리스본의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동안 섭정으로 군림하던 페드루 왕자는 그가 죽자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2세로 등극했다.
[1]
1640년 12월 1일 주앙 4세의 대 스페인 봉기에 가담한 두 아들의 손을 묶고 조국을 부흥시키지 못하면 집에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