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정실
미다이도코로 스겐인 崇源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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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73년 | ||
오미국 아자이군 오다니성 (현 시가현 나가하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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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26년 11월 3일 (향년 54세) | ||
무사시국 도지마군
에도
에도 성 니시노마루 (현 도쿄도 치요다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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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미다이도코로 | ||
1605년 6월 2일 ~ 1626년 11월 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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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우(江) | |
부모 |
친부
아자이 나가마사 친모 오이치노카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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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언니
요도도노 언니 죠코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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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사지 카즈나리 (연도 불명) 도요토미 히데카츠 (1586년 결혼~1592년 사별) 도쿠가와 히데타다 (1595년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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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전국시대에서 에도 막부 초기의 인물. 에도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정실이다. 아자이 나가마사와 오이치의 3녀. 언니로 요도도노, 죠코인이 있다.스겐인은 사망 이후 받은 법명이며, 본명은 고(江), 혹은 에요(江与)로 보통 오에요노카타(お江与の方)라고 불린다. 조정에서 종1위의 품계와 함께 「達子(사토코)」라는 이름을 받기도 했다.
2. 생애
1573년 오미국 오다니성[1]에서 태어났다. 출생연월일이 1573년이라는 것은 덴쇼 12년에 12살이었다는 기록에서 역산하여 추정한 것으로, 확실하지는 않다.아직 젖도 떼지 못한 아기일 때로 보이는 1573년 9월 1일[양력] 아자이 나가마사는 패망하고, 나가마사의 배려로 오이치와 고우를 포함한 3자매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다만 이 기록에 대해서는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고, 고우는 이미 오다니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어쨌든 노부나가의 배려로 이세 우에노성[3]으로 가서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카네(織田信包, 1543 ~ 1614)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나게 된다. 그러다가 1582년 6월 2일,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죽음을 당하자 이후 노부나가의 후계를 놓고 한바탕 내전이 벌어지게 된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키요스 회의에서 어머니 오이치는 시바타 가츠이에와의 재혼을 선언하고, 3자매는 에치젠의 키타노쇼성[北ノ庄城]옮겨 살게 되었다. 그러나 1583년, 시바타 가츠이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키타노쇼성도 함락되자 오이치는 자결하고 만다. 이후 3자매는 히데요시에 의해 교토로 보내졌거나 혹은 아즈치 성으로 보내졌다는 설도 있다.
이후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를 회유하려는 목적에서 노부카츠의 가신인 오와리의 오노 성주 사지 카즈나리(佐治一成, 1569 ~ 1634)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좀 불확실하다. 히데요시가 정략결혼을 명한 것이 아니라 오다 노부카츠가 사지 가문과의 화해를 위해서 고우를 시집보냈다는 설도 있고, 약혼만 했을 뿐 실제 결혼까지는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즈나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왔다는 이유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히데요시는 자신의 조카 하시바 히데카츠에게 고우를 시집보내게 되는데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시바 히데카츠는 조선에 건너갔다가 거제도에서 병사하는 바람에 고우는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렸다. 히데카츠와의 사이에는 딸 사다코를 낳았다고 하는데, 사다코는 공가(公家)쿠죠 유키이에(九条幸家, 1586 ~ 1665)에게 시집갔다고 하며, 오사카 성 여름 공방전 이후에는 스겐인의 부탁을 받고 히데타다의 양녀가 되었다고 한다.
1595년, 고우는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재혼하게 된다. 본래 히데타다의 결혼 상대는 히데요시의 양녀이자 오다 노부카츠의 딸인 오히메였지만 오히메가 죽는 바람에 이 혼사는 물건너 가게 되었고 대신 고우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히데타다와의 결혼은 세 번째 결혼으로, 이에 반해 히데타다는 2번째 결혼이었기 때문에 신혼 때는 사이가 약간 서먹서먹했다는 말도 있다.[5]
1597년에 히데타다의 딸인 센히메를 낳았고, 아들 도쿠가와 이에미츠와 도쿠가와 타다나가를 낳아 2남 5녀를 두었다. 후에 고미즈노오 덴노의 중궁이 되어 메이쇼 덴노를 낳은 마사코도 그녀의 딸. 파란만장했던 전반의 삶과는 달리 후반의 삶은 쇼군의 생모로서 안정된 삶을 살게된다. 실제로도 차기 쇼군을 낳은 유일한 정실 부인이라고. 다만 그녀는 장남 이에미츠를 싫어하고 차남 타다나가를 편애해 타다나가를 차기 쇼군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6]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로 사료에서 고우가 차남 타다나가를 일방적으로 아끼고 장남 이에미츠를 소홀히 다루었다는 등의 구체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타다나가를 차기 쇼군으로 만들려고 한 일차사료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방증 사료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
어머니 오이치와 마찬가지로 대가 센 여자였다고 한다(게다가 남편 히데타다보다 6살 연상). 히데타다가 공처가라서 남편과의 사이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이 영향으로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7]
1626년 에도성 니시노마루에서 사망해 화장되어 묻혔는데, 2차대전 이후인 1958년 스즈키 히사시(鈴木尚, 1912 ~ 2004) 등이 조조사의 도쿠가와가 묘소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묘도 발굴되었다. 화장된 뼈가 발견되었는데, 뼈의 골격등으로 미루어 보면 상당히 몸집이 작고 가녀린 미녀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고. #
3. 대중 매체에서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PK에서 특전무장으로 등장.
2000년 NHK 대하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서 비중있게 그려진다. 이와시타 시마가 연기했다.
2011년 NHK의 대하드라마 고우 ~공주들의 전국~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다. 고우 역에 우에노 주리가 캐스팅 되었다.[8]
오오쿠-제 1장에서도 나온다.[9]
2016년 NHK의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 에선 배우 니이즈마 세이코가 맡았다.
만화 센고쿠에서 등장하는데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센고쿠 히데히사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시집가는 그녀를 호위하는 데 시종 얌전한 모습을 보이다가, 정작 히데타다 앞에서는 콧구멍에 젓가락을 꽂아 넣은 모습으로 등장해 히데히사를 벙찌게 만든다. 그런데 히데타다는 그런 그녀를 보고 홀딱 반해버린다.
[1]
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시에 있었던 산성터
[양력]
9월 26일
[3]
현재의 미에현 이가시 우에노 마루노우치에 있는 제곽식 평산성으로 1611년부터 도도씨(藤堂氏)가 거주하는 성으로 변모하며 현재의 규모로 확장하게 된다.
[北ノ庄城]
후쿠이현 후쿠이시에 있는 윤곽식 평성으로 에도시대 초기에 어려가지 이유로 후쿠이성(福井城)으로 고쳐지며 에치젠 마츠다이라씨의 거성이었다가 지진, 메이지 시대의 해체 등으로 공원, 공공시설이 안으로 들어왔다.
[5]
여기에는 히데요시가 중매 해줬다는 썰이 있다.
[6]
주로 여러 작품에서 나오는 설로는 이에미츠가 좀더 익숙하고 편한 상대인 유모
오후쿠를 친모인 자신보다 더 잘따랐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7]
물론 그와 별개로 아들은 얻었기 때문에 후사를 얻는 데에는 성공했다. 명문가 정실이 아닌 낮은 신분의 첩에게서 얻은 것을 보면 어머니가 보여준 명문가 여성 특유의 높은 자존심과 강한 자기주장에 질렸던 모양이다. 이는 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도 유사한 점이다.
[8]
배경이
임진왜란 때인데, 그 때
조선 쪽 배우들의 복장을 KBS 측에서 제공해주었고, 임진왜란을 다룰 때
불멸의 이순신 해전씬을 편집하여 내보냈다. 그 답례로 NHK는 국내 사극인
징비록에서 일본 쪽 후스마에 및 세트장을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9]
여기서는
타카시마 레이코가 이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