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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탁세스 왕조 11대 샤 Ariobarzanes | 아리오바르자네스 |
||
제호 | 한국어 | 아리오바르자네스 |
그리스어 | Ariobarzanes | |
존호 | 샤 | |
생몰 년도 | 미상 ~ 4년 | |
재위 기간 | 2년 ~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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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아르탁세스 왕조 11대 샤.2. 생애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군주 아르타바스데스 1세와 아테나이스의 장남이다. 기원전 30년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가 자신을 버리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손 잡은 것을 응징하고자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를 침략하여 아버지를 생포하고 사촌인 아시날루스를 왕위에 올렸다. 이때 그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알 수 없으나,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파르티아에서 내전이 발생해서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탈옥한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망명했다.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는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대군을 사열한 뒤 프라아테스 4세와 협상한 끝에 마침 이 무렵에 사망한 아시날루스의 뒤를 이어 아리오바르자네스를 새 왕으로 세우는 데 합의했다. 이리하여 어렵게 왕위에 복귀했지만, 기록이 미비해서 어떤 통치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로마 덕분에 왕이 된 만큼 친로마 정책을 시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1년,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4세가 이민족과의 전투를 치르던 도중 전사했고, 티그라네스 4세의 아내이자 공동 왕이었던 에라토는 서기 2년까지 단독 통치하다가 정치 혼란이 극심해지자 퇴위했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의 왕위가 공석이 되자, 아우구스투스의 특명을 받고 동방으로 파견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리오바르자네스를 새 왕으로 세우고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프라아테스 5세와 면담해 파르티아의 동의를 받아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인들은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자질에 감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사료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친로마 정책을 추구하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4년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했다고 전해지는데, 정황상 아르탁세스 왕가가 아닌 자가 왕위에 오른 것에 반감을 품은 이들의 음모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후 아들 아르타바스데스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2년 후인 6년에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