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01030, #dc143c 20%, #dc143c 80%, #b01030);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아리아라테스 1세 | 아리아라테스 2세 | 아리아람네스 | |
<rowcolor=#fff> 제4대 | 제5대 | 제6대 | |
아리아라테스 3세 | 아리아라테스 4세 | 아리아라테스 5세 | |
<rowcolor=#fff> 제7대 | 제8대 | 제9대 | |
아리아라테스 6세 | 아리아라테스 7세 | 아리아라테스 8세 | |
<rowcolor=#fff>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아리아라테스 9세 |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 |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 | |
<rowcolor=#fff>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 | 아리아라테스 10세 | 아르켈라오스 | }}}}}}}}} |
<colbgcolor=#dc143c><colcolor=#fff> | |||
|
|||
출생 | 생년 미상 | ||
사망 | 기원전 130년 (향년 ?세) | ||
재위기간 | 카파도키아 국왕 | ||
기원전 163년 ~
기원전 130년 (32~33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c143c><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아리아라테스 4세 어머니 안티오치스 |
|
배우자 | 니사 | ||
자녀 | 아리아라테스 6세, 데메트리오스 | ||
형제자매 | 오로페르니스, 스트라토니케 | }}}}}}}}} |
[clearfix]
1. 개요
카파도키아 왕국 6대 국왕.2. 생애
카파도키아 왕국 제5대 국왕 아리아라테스 4세와 셀레우코스 제국 6대 왕 안티오코스 3세의 딸 안티오치스의 아들이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안티오치스는 남편의 사이에서 자식이 좀처럼 태어나지 않자 아리아테스와 오로페네스를 자기가 낳은 아이로 속여서 후계자로 삼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안티오치스가 두 딸과 미트리다테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에 그녀는 남편에게 진실을 밝혔고, 아리아테스는 약간의 용돈을 받고 로마로 보내졌고 오로페네스는 아이오니아로 보내졌다고 한다.그 후 미트리다테스는 이름을 아리아라테스로 바꾸고 아테네로 유학가서 철학과 문학 작품 전반을 숙달했다. 페르가몬 왕자 아탈로스 2세와 함께 철학자 카르네아데스의 제자로서 공부했고, 카르네아데스와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로마를 일시적으로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의 총명함에 매우 흡족해 왕위를 넘겨주려 했지만, 그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왕자의 신분으로 남겠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기원전 163년 아리아라테스 4세가 사망하자, 그는 국내로 돌아와서 아리아라테스 5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로마와의 동맹을 갱신하고자 사절을 보냈다. 원로원은 친로마 성향인 그를 좋게 봤기에 기꺼이 동맹을 갱신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했다. 그런데 남편이 사망한 후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던 어머니 안티오치스가 딸과 함께 불분명한 상황에서 살해당했다. 안티오코스 5세의 섭정을 맡았던 리시아스가 두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단지 유물을 반환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어머니의 유골이 도착하자, 그는 아버지의 무덤에 합장시켰다.
기원전 163년, 로마는 갈수록 강성해지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친하게 지내는 카파도키아 왕국을 경계하여 갈라티아인을 꼬드겨서 카파도키아 일부를 공략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아리아라테스를 문책하기 위해 마르쿠스 유니우스가 이끄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아리아라테스는 로마 사절단을 잘 대접하면서 로마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후 대 그라쿠스가 이끄는 또다른 사절단이 찾아왔을 때도 역시 융숭하게 대접하면서 로마를 끝까지 지지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에 로마는 카파도키아 왕국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고 그를 인정했다.
기원전 161년,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로마를 탈출한 뒤 안티오키아로 잠입한 후 정변을 일으켜 사촌인 안티오코스 5세와 리시아스를 처형하고 셀레우코스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데메트리오스 1세가 로마의 허락을 받지 않고 왕위에 오른 걸 비판하면서 원로원이 나중에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어떤 결정을 내리든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해 로마의 호감을 얻어냈다. 얼마 후 데메트리오스 1세가 누이 라오디케를 그와 결혼시키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이것이 반로마 정책으로 여겨질 걸 두려워하여 거절했다. 이후 1만 달란트 짜리 왕관을 로마로 보내면서 데메트리오스 1세가 자신에게 결혼 동맹을 제의했지만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에 원로원은 그에게 왕실의 휘장인 홀과 상아 보석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결혼 동맹 제의가 거절당하자, 데메트리오스 1세는 이참에 카파도키아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아이오니아로 보내진 뒤 아리아라테스 5세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오로페르네스를 자기 편으로 끌여들어 자금과 군대를 지원해 카파도키아에서 활개치게 했다. 아리아라테스 5세는 페르가몬 왕국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가 곧 사망하는 바람에 별다른 지원을 얻을 수 없었다. 기원전 158년, 데메트리오스 1세는 카파도키아를 전격 침공하여 아리아라테스 5세를 폐위시키고 오로페르네스를 새 왕으로 앉혔다.
아리아라테스는 로마로 망명한 뒤 그들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로마에 파견한 사절인 미티아데스와 오로페르네스의 사절인 티모테우스와 디오게네스가 의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서 의원들을 설복시키는 바람에 실패했다. 원로원은 아리아라테스와 오로페르네스가 권력을 공유할 것을 제안했지만 양자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아리아라테스는 페르가몬의 새 군주 아탈로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아탈로스 2세는 아리아라테스의 누이이자 형 에우메네스 2세의 아내였던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했으며,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전례도 있었기에 그를 기꺼이 도와주기도 했다.
아리아라테스는 페르가몬 왕국의 지원에 힘입어 기원전 157년 또는 156년에 카파도키아를 되찾았고, 오로페르네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망명했다. 이보다 전, 오로페르네스는 아리아라테스와의 갈등이 자신에게 손해를 입힐 경우를 대비해 프리에네의 아테나 신전에 400달란트를 맡겨뒀다. 아리아라테스는 프리에네에 사절을 보내 그 돈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프리에네 시는 오로페르네스가 아직 살아있으니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에 아탈로스 2세와 함께 프리에네 시를 공격하여 주변 일대를 약탈했다. 프리에네 주민들은 로도스와 로마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결국 프리에네 시는 배상금을 아리아라테스에게 지불하고 그의 지배를 따르기로 했다.
기원전 155/154년, 비티니아 왕국 군주 프루시아스 2세와 아탈로스 2세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그는 자신을 도와준 아탈로스 2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페르가몬군에 합류한 카파도키아 군대의 수장은 그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였다고 한다. 한편, 오로페르네스는 안티오키아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데메트리오스 1세를 타도하려 했다가 발각당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오르페르네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지만, 셀레우키아에 가두고 생명을 빼앗지 않기로 해, 그가 아리아라테스의 정적으로 남도록 했다.
기원전 150년, 아리아라테스는 데메트리오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아탈로스 2세,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함께 지원했다. 그 결과 데메트리오스 1세는 전쟁에서 패해 목숨을 잃었고,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 이후 수십년간 나라를 평온하게 다스리던 그는 기원전 132년 아리스토니코스가 로마의 페르가몬 왕국 병합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를 도와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원전 130년 아리스토니코스와 손을 잡은 트라키아인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했다. 나중에 반란이 진압된 뒤, 로마는 자신들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그에게 보답하기 위해 카파도키아 왕국에게 리카오니아와 킬리키아를 넘겨줬다.
그는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1세의 딸 니사와 결혼하여 6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가 기원전 130년에 전사한 후, 니사는 막내아들 아리아라테스 6세를 왕위에 올려놓고 섭정에 오른 뒤 다른 다섯 아들을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독살해버렸다. 그녀는 아리아라테스 6세가 점차 성인이 되어가자 그마저 죽이려 했다가 왕조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사 잔인하게 살해당했다.